'호설암'[1823-1885] 하면 들어 보신 분도 있을 겁니다.
청나라 말기 최고의 상인으로, 엄청난 부를 소유했으며,
대신급(즉 영결급이라고 해야곗죠)인 '1품홍정상인'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청나라 역사에서 1품홍정상인은 호설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도 호설암이 당시 권력자인 좌종당에게 올인한 댓가이지만요)
그러나, 호설암의 제국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항주에 호경여당이란 약방 하나만 남았을 뿐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 지금부터 풀어 놓겠습니다.
호설암은, 외국 상인들과도 교역을 했는데,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호설암이 당시 동원할 수 있던 자금은 은 1천만냥이었습니다.
1냥은 은 37.5그램, 현재 은 한 돈이 900원 정도이니 한 냥은 9000원, 그러니까 호설암이 동원할 수 있던 현금 1천만냥은 약 900억원 정도 되겠습니다.
여기에, 호설암은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전장들에 명하여, 모든 대출을 중지하고 대출금을 혹독하게 받아내도록 했습니다.
이리하여 은 2천만냥(1800억원)정도를 마련한 호설암은, 다른 곳에서도 돈을 빌려,
청나라 전역에 있던 모든 실크를 매점했습니다.
서양 상인들은 난리가 났지요. 당장 호설암을 찾아갔습니다.호설암은 왕족들이 입는 옷을 입고 태연히 그들을 맞았습니다.
호설암은, 자기가 산 값의 딱 두 배만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즉, 실크 1천 관에 지금까지의 시세는 은 2천 냥이었는데, 4천 냥만 내놓으라고 했지요.
서양 상인들은, 3천 냥으로 하자고 했고, 호설암은 3200냥 이하론 절대로 안 된다고 우겼습니다.
서양 상인들은 화가 나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바뀌자, 그 해의 실크가 다시 시장에 나왔고, 호설암은 이를 매점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설암은 다른 상인들에게, 자신과 동업해서 금년의 실크도 매점하여, 서양인들을 두손 들게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해 보았자 제일 큰 이익은 호설암이 볼 텐데, 그를 도와 주기 싫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호설암은 서양 상인들에게 가서 3천 냥으로 거래하자고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서양 상인들은, 호설암의 라이벌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었습니다. 실크는 오래 두면 변질되며, 호설암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서양 상인들은, 다 생깠습니다.
호설암은 2천 냥 제의를 해 왔고, 서양 상인들은 1천 냥으로 하자고 맞제의했습니다. 실크 물량이 엄청나니 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였지요....
청천벽력을 맞은 호설암은 버티어 봤으나, 결국 1천 2백 냥으로 낙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한방으로 호설암은 무려 8백만 냥 (720억원)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호설암 개인의 자본은 1천만냥, 그리고 나머지 1천만냥은 전장에서 거둬들인 돈과 전장에 예금한 돈들이었습니다. 8백만 냥에다, 차입한 돈의 이자, 실크 저장비 등을 합하면 호설암 개인의 동원가능현금은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전주들은, 호설암이 계속 돈을 내어주지 않자, 마침내 북경의 서태후를 압박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서태후도 호설암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경에서 관리들이 내려와, 호설암의 남은 재산을 모두 동결하고 그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홍루몽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지요)
호설암은 실의에 빠져 곧 죽었다고 합니다.
역시 호설암의 은혜를 입었고 당시 항주에 주둔하고 있던 절강 순무(사령관) 유병창은, 호설암의 저택 중 별채 한 개를 구입해서, 호설암의 유족들에게 그걸로 먹고 살라고 내 주었다고 합니다.
호설암 가족들은 그 별채에 약방을 차렸고, 그래서 천하를 주름잡던 호설암의 이름은 호경여당이란 약방 한 곳에만 전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호설암은 임상옥보단 행복했지요. 임상옥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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