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동아일보에 무협소설에 대하여 좋지 않은 글을 쓰셨기에 그분이 재직하는 도서관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지난 11월 15일 토요일, 우연한 기회에 동아일보의 독서교실란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학교도서관 총괄 담당이라시기에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명문대학 합격이라는 지상목표 하에 갈수록 황폐해지고 있는 교육 현장에서 고군분투하실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참고로 저는 38살에 **대 사회학을 오래전에 졸업했고, 현재 아이 둘을 키우며 출판 쪽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제가 무협소설에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고, 중학교 시절부터 수많은 무협소설을 접한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글에 문제점과 섭섭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명예도 경제적 보상도 빈약한 무협소설계에서 좋은 작품들을 만들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을 작가 분들이 혹시 선생님의 글을 읽었을 때 느낄 허탈감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가 학생들에게 재미와 감수성을 충족시키면서 좋은 책을 읽기 위한 달콤한 치료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치료는 무협소설과 판타지에 중독되어 있는(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독서중독) 학생들이 대상이 될 거구요.
저 또한 로마인이야기를 재미있고 유의미하게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독을 권하는 책입니다. 부분적으로 제국주의와 왕정주의의 폐해를 간과하거나 미화한다는 느낌도 받지만, (작가는 동시대인의 눈으로 볼 것을 전제하므로 이를 수용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괜찮은 책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먼저, 저는 무협소설에 대한 선생님의 지적, 즉 '이 책들은 대부분 선과 악의 대결, 주인공의 고난과 극적 승리, 권선징악적 주제라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이라는 지적에 대하여는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런 주제가 나쁜 건가요? 이런 주제들은 좋게 말하면 계몽주의의 아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전시대의 소산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친일파 하나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넘어온 우리 민족에게, 독재 정권에 영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이 소위 민주화 시대의 과실을 만끽하고 있는 이 시대에 권선징악이라는 주제가 소박하고 유치할지는 몰라도 나쁠 것은 없지요. 오히려 요즘의 무협소설들은 이런 부분이 적어지는 것같아(세상을 이분법으로 가르기만은 곤란하지요) 한편으로는 아쉬울 정도입니다. 현재 무협소설은 좋은 작가들에 의하여 매우 다양한 내용으로 확산, 발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선생님의 지적,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법, 이런 책들에 익숙한 아이들은 좀처럼 다른 형태의 책들을 읽지 못한다.', '(무협소설이나 환타지류의) 독서 중독에 빠진 학생들은 성장을 멈춘 아이와 같다.'에 대하여는 내용에 대하여는 '과연 이분이 무슨 무협소설을 읽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쉬운 사례로 무협소설을 영화한한 '와호장룡'이나 '반지전쟁'과 같은 판타지류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곧 중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성장을 멈춘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이런 류의 소설들을 읽고 가능하면 중독 수준의 매니아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아직 매니아 수준은 못됩니다), 다른 책을 읽지 못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점에서는 무협소설만한 것도 없다는 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들, 아직 뭐가 뭔지 구분할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좋은 문화, 좋은 책들을 많이 보고, 많이 읽히게 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런데, 과연 좋은 책과 나쁜 책의 차이는 무엇이고, 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대중가요와 코미디, 만화를 고급문화와 일류문화에 대비되는 저급문화, 삼류문화로 매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자본의 힘인지, 대중매체의 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들을 헐값으로 쉽게 매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양하듯이 문학도 매우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가 무협소설입니다. 무협소설은 그 나름의 멋지고 신나는 세계가 있고, 독자들을 감동하게 하고, 사색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문학작품들이 그렇듯이 무협소설 또한 수준 차이가 있고, 독자들마다 느끼는 감동과 재미 또한 다르겠지요.
학생들에게 무협소설을 호환마마로 세뇌시켜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하기 보다는 (문제는 아무리 그렇게 세뇌시켜도 갈 학생은 간다는 거죠), 학생들에게 무협소설 작가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쓴, 괜찮은 무협소설들을 읽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주시는 것은 어떨지요.
요즘 무협소설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묵향'이나 '비뢰도'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무협소설 분야에서 기성 세대에 속하는 저도 이런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의 아이들이 이런 소설들을 읽는다면 저도 읽을 생각입니다. 뭘 알아야 아이들과 얘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선생님께서 전혀 무협소설을 접하지 않으셨다면, 그나마 선입견을 줄이기 위하여 우리나라 작가들의 다음 소설들을 권하고자 합니다.
임준욱의 건곤불이기, 좌백의 대도오, 금강의 위대한 후예, 이재일의 쟁선계, 용대운의 군림천하 등입니다. 대만의 김용이 쓴 영웅문 같은 소설도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도 좋은 작가들이 아주 많습니다.
학교 홈페이지를 보니, 도서관에 책들이 많더군요. 가능하다면, 무협소설이 귀 학교 도서관의 서가에 극히 일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인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최소한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하는 교육적인 효과는 있을 겁니다.
사전에 양해도 없이 방법이 마땅찮아 여기에 써서 보냅니다. 결례를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하는데, 그 희망의 현장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희망의 끈을 꼬옥 부여잡고 계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경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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