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활만 중시했다는 건 근대의 환상이고 사냥도 농사 짓기 전에는 창도 썼습니다.
어제 썼던 ‘다른 누가 한국은 칼이 없었고 그 이유가 이렇다더라. 틀린 말이고 굳이 따지면 반대다’라는 글에 이상한 댓글들이 달리고 주제와 틀린 이상한 방향으로 빠지더니 결국 토론마당으로 이동 되었다는 쪽지 오네요. 딱히 토론이 되던 건 아니고 그냥 이상한 방향으로 빠지던 거였는데? 전혀 상관이 없는 치우니 뭐니에 집착하고. 우리가 칼이 있었다는 건 굳이 구려가 고조선 영토라는 후한서 기록 안봐도 고고학만으로도 증명 되는데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모든 무기가 다 있었고 다 썼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기들 다 훈련하고 배웠었습니다. 훈련도감에서 칼도 가르쳤었습니다. 그러면 무과 시험에서는 활만 시험 했느냐? 이것도 아닙니다. 수박이나 창도 무과 시험에서 시험 했습니다. 결국 활만 중요시했다는 것은 근거 없고 근대에 생긴 환상입니다. 활을 ‘더’ 가르쳤느냐 우기면 근거 없는 소리이고 할 말 없네요. 훈련도감에서는 다 가르치고 무과 시험에서도 활만 보는 거 아닙니다. 그 외에 뭘로 그런 억지가 성립 되는데요? 훈련도감에서 어느 무기를 몇시간 가르치는지 기록으로 보신 겁니까? 근거 없는 환상입니다.
사냥이 농사짓기 전부터 활로만 사냥했다는 것도 환상입니다. 낚시도 낚시대로 하는 레져 낚시가 있고 어부들이 그물도 쓰면서 제대로 하는 생활 낚시가 있지요. 사냥도 활로만 하는 레져 낚시가 있고 창 등 모든 무기들 제대로 쓰면서 하는 생활 사냥이 있습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되기 전에 했던 게 바로 이 생활 사냥이고, 활이 발명 된 다음에도 창 등 근접전 무기들도 쓰면서 사냥 했습니다. 사냥 벽화에도 같은 시대에 활과 몽둥이 다 그려져 있고, 발굴도 활 발명 후에도 창, 도끼 등 발굴 됩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면서 생활 사냥이 사라지고 활만 쓰는 레져 사냥이 시작된 건데, 이건 농부로서 시작한 거지 사냥민족으로서 하던 게 아니지요. 베르비쯔끼의 알타이 사냥민족 기록을 봐도 중세시대까지 창 도끼를 총과 같이 갖고 다니며 사냥 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던 알타이의 민족들이라는 책 읽었습니다. 활만 쓰는 사냥은 활이 발명된 이후가 아니라 그때도 여전히 창도 쓰며 사냥 했습니다. 활만 쓰는 사냥은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에 농부로서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사냥과는 상관 없이 군대도 무기도 있었고요. 어느 원시 시대를 문명 시대를 봐도 활뿐만이 아니라 창, 칼 등 모든 무기들 다 기록 되어 있고 발굴 됩니다.
한국은 활만 집중했고 다른 무기들은 집중하지 않았다는 착각에 대하여
지난번에 다른 토픽에 대해서 얘기 하다가 어쩌다가 나온 내용인데 그런 착각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간단히 말해서 틀렸습니다. 진법을 봐도 근접전 무기나 활이나 둘 다 중요시 했었고, 훈련도 훈련도감에서 칼과 창을 포함해서 다 항상 가르쳤었습니다. 그리고 무과 시험에서도 창 시험 봤었고요. 활만 본 거 아닙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A%B2%80+%ED%95%99%EC%8A%B5+%EB%B3%91%EC%A1%B0%EC%9D%98+%EA%B1%B4%EC%9D%98
“장(杖)·검(劍)의 학습을 다만 방패(防牌) 10명만을 선정하니, 그들로 하여금 여러 사람에게 전습 이해시킨다는 것은 실로 부족하오나, 방패 대장(隊長)·대부(隊副)의 장건한 자를 택해 40명을 증가하고 동절과 하절에 이를 훈련하게 하고, 한량(閑良)으로 자원하는 자도 아울러 그 연습을 허용하시기를 청합니다.”
보다시피 칼을 필수과목으로서 항상 가르쳤었습니다. 세종 시대에도.
한국이 활만 중요시 했다는 건 택견이 발만 쓴다는 착각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만들어진 환상이고 틀렸습니다.
근대에 만들어진 환상 같아요. 적어도 조선왕조기록을 보나 옛날 기록들을 보나 군대 진법 기록을 보나 활이 특별히 검과 창보다 더 중요시 된 기록은 없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C%8B%A0%EC%A7%84%EB%B2%95
"기병(騎兵)의 2통(統)안에는 사(射)와 창(槍)을 갖추는데, 대개 5분의 3을 사(射)로 하고, 5분의 2를 창(槍)으로 한다. 그러나, 사람의 장기(長技)에 따라야 하므로 반드시 미리 정할 것은 아니다.【총(統)·검(劍)에 있어서도 마땅히 이를 써야 한다.】 보병(步兵)의 통 안에는 궁(弓)·총(銃)·창(槍)·검(劍)·팽배(彭排)를 갖추는데, 5가지의 병수(兵數)를 고르게 한다."
무과 시험에 대해서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칼은 가르치기는 했지만 무과 시험에서 보지는 않은 것 같고 창은 봤습니다. 갑을창과 삼갑창으로 무과 시험들 검색 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A%B0%91%EC%9D%84%EC%B0%BD+%EB%AC%B4%EA%B3%BC "갑을창(甲乙槍) : 조선조 때 무과(武科)에서 갑(甲)과 을(乙) 두 사람을 맞붙여서 실제로 규정된 법식대로 창(槍)을 쓰게 하던 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C%82%BC%EA%B0%91%EC%B0%BD+%EB%AC%B4%EA%B3%BC "관무재할 때처럼 한량(閑良)을 막론하고 1백 명을 뽑아 좌우에 각각 50명씩 나누어, 혹은 위에서 아래로 달리며 쏘다 혹은 아래에서 위로 달리며 쏘도록 하되, 쏘아서 맞힌 점수를 따로 계산하지 말고 양편의 것을 합계하여 승부를 결정해야 한다. 삼갑사(三甲射)와 삼갑창(三甲槍)은 한 대(隊)를 4명씩으로 하되 재간 있는 사람을 잘 가려서 하고, 격구(擊球)는 11명이 각각 한 차례씩 하도록 하라" 관무재는 무과를 말합니다.
그리고 칼은 무과 시험에서는 안봐도 훈련도감에서 어쨌든 가르쳤습니다. 훈련했고 집중한 무기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보여줬듯이 애초에 사냥은 활로만 하는 게 아니라 창과 몽둥이 등 각종 무기들을 다 썼었고, 활만 쓰는 놀이용 사냥이 시작된 것은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입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벽화를 봐도 몽둥이 사냥과 활 사냥 둘 다 그림으로 있습니다. 활 사냥만 놀이로 하는 건 농사꾼으로서지 사냥민족으로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냥 외에 군대를 봐도 옛날부터 각종 무기 다 써왔고 검도 있었습니다. 군자국 기록과 치우 기록을 보지 않아도 어쨌든 그 시대에도 우리에게 검은 존재 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32901 그리고 군자국 기록과 치우 기록도 사마천이 사기 쓴 시절에도 어쨌든 그렇게 인식 하고 있었고요.
물적 증거라면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1553.html 요하문명 같은 거요?
창이나 도끼도 있었습니다. http://newdle.noonnoppi.com/xmlviewculture.aspx?xmldid=30980
사냥이 활 발명된 후에도 근접전 무기로도 사냥 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했었고 우리도 같은 시대 벽화에 몽둥이 사냥도 활 사냥도 둘 다 그려져 있고, 발굴되는 도구들도 활 발명된 다음에도 칼, 창, 도끼 등 발굴 됩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활 사냥만 놀이로 하게 된 거에요. 이 시기에는 이미 농사꾼이지 사냥민족이 아니지요. 농사를 본격적으로 안하던 시기에는 모든 무기를 다 써서 사냥 했습니다.
http://cont122.edunet4u.net/~kym920903/sunsa/bangu1.html
그리스처럼 외국 기록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렇게 사냥 했어요.
http://www.bbc.co.uk/schools/primaryhistory/ancient_greeks/home_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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