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잡고있던 펜을 놓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것 같았을 뿐인데 어느샌가 새벽의 어두운 푸르름이 방안을 조금씩 침식해오고 있었다. 나는 책상의 위에서 흔들거리는 초롱불을 입으로 훅 불어서 끄고 방금 전까지 펜으로 까만 글씨를 가득 채워온 두꺼운 책을 조용히 덮었다. 건조한 방 공기 때문인지 먼지가 이리저리 흩날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나는 이내 그것을 잊어버렸다. 의자 옆에는 단조로워 보이는 침대가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가서 눕기보다다는 그저 앉아있던 의자에서 고개를 위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오른팔을 들어서 눈 위를 지긋이 눌렀다. 초롱불에 피로해진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듯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피곤하다. 조금 자두는 편이 좋을까? 아니, 지금은 잠이 오지 않는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나의 마음을 짓밟고 있었다. 이런 혼란스런 마음으로 잠을 청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내가 이걸 쓰는동안 그녀는 잘 쉬었을까? 점점 새벽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날이 밝아오면 가서 조심그럽게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 그녀의 단잠을 깨우리라. 그러면 그녀는 아직 졸린 눈을 부비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전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요동치는 심장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쓴 이야기, 과연 나는 잘 써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보면서 생각하면 유쾌하면서도 그립고, 즐거우면서도 슬픈 이야기. 펜을 멈춘곳 이후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멤도는 나로서는 폭풍치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얼굴, 그의 웃음, 그의 비웃음, 그의 표정, 그의 말투, 그의 목소리, 그의 생각... 모든 것이 아직도 안개처럼 내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왜 내가 지금 그를 이토록 찾고 있는 것인지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그였지만 항상 가려진 커튼을 들춰보면 그는 나의 이해력을 월등히 뛰어넘는 행동으로 나를 비웃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 했다.
금세 진정되던 기분이 다시 용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울고싶은지, 아니면 웃고싶은지, 아니면 그저 미쳐버리고 싶은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에 숨쉬는것조차 벅차서 나는 그렇게 의자에 앉은채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소리없는 아우성. 그녀가 깰까봐 입 밖으로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나의 아우성은 그렇게나 진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등 뒤에서부터 나의 목을 휘감는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이리나드."
나의 속삭임에 그녀의 숨결이 대답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따스한 숨결에 나의 긴장한 몸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좀 더 자."
나는 고개를 들며 작게 속삭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휘날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유달리 아름답게 느껴졌다.
"잠이 안와?"
그녀의 간지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니, 저거."
나의 왼손이 나의 목을 휘감은 그녀의 손 위를 가볍게 덮으면서, 나의 오른손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두터운 책을 집어들었다. 나는 말했다.
"이야기를 쓰고있어."
"루프의?"
그녀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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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파는 자’라 불리는 한 행상인과 그와 동행하게 된 한 소년의 운명을 가르는 여행. 때론 따듯하게, 때론 긴박하게, 때론 웅장하고, 또 애절하게 다가오는 그들의 여행 이야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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