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곤지
작품명 : 리트레이스
출판사 : 로크미디어
1.
리트레이스는 문피아에서 '돌아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연재되던 글입니다. 선작은 해놓았으나 온라인으로 글 읽는 것이 피곤한 나이인지라 책으로 나오고 나서야 집어들게 되었네요. 리트레이스는 정말 잘 쓰여진 글입니다. 읽으며 계속 감탄사를 터뜨렸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취향 이전의 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이 작품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탄탄한 문장, 꽉 짜인 세계관, 디테일의 극에 달한 설정, 깊이있는 묘사, 그물처럼 얽힌 이야기. 높이 평가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곤란할 지경입니다. 원래라면 저는 리트레이스란 소설에 열광해야 마땅할 겁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단점이 그 모든 장점을 덮어버리더군요.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
2.
작가는 글에 흠뻑 취해서 솜씨를 부리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얼마나 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 속에 깊이 빠져 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문장에도 한껏 기교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멋드러지죠. 하지만 그렇게 소설에 풍덩 빠지면서 독자의 입장에도 서 보았는지는 의문입니다.
몇달 전 검은가시나무광대로 유명한 송성준님께서 안테노라 사이크란 라이트노벨을 들고 컴백하셨습니다. 안테노라는 멋진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송성준님께서는 오랜만의 컴백에 너무 글욕심을 내셨더군요. 절제의 'ㅈ'조차 염두에 두지않고 내달린 듯한 글이었습니다. 비록 방향성은 조금 다를 망정, 저는 리트레이스에서 이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3.
가독성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얘기하면 독자가 얼마나 쉽게 글을 읽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내용이 쉽다고 가독성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내용, 복잡한 스토리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솜씨가 뛰어나다면 높은 가독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작가가 책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걸 때 얼마나 조리있고, 알아듣기 쉬운 언어를 쓰느냐 하는 문제죠.
상대성이론을 설명한다 할지라도 한국어로 차분히 설명해주면 충분히 이해가능합니다. 하지만 어제 먹은 삼겹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베트남어로 설명한다면 알아들을 수가 없겠죠. 리트레이스를 비슷한 식으로 표현해보자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고어로 멋드러진 제국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귀에 안들어오는 느낌.
4.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보겠습니다. 리트레이스는 제게 있어 한마디로 '복잡한' 글입니다. 설정도 복잡하고, 이야기 전개도 복잡하며, 전달해주는 방법도 복잡합니다. 대화도 복잡하고,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이 뒤섞여있는데 구분하기 힘드니 그또한 복잡합니다.
4.1
일단 설명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아주 사소한 행위, 조그마한 흔적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모두 나열합니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은 적당히 보고 넘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것조차 구분이 안되니 하나하나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게 되어 더 힘듭니다. 대충 넘어가자니 이후 더 큰 의문으로 돌아올까 두려워집니다.
타국의 노예소년 한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타 소설이라면 반페이지만에 끝나겠죠. 하지만 리트레이스에서는 두 제국 간의 노예에 대한 입장차이, 법리적 해석에 대한 관점의 차이, 그로 인한 행동지침, 동일 사례에 대한 과거의 판례, 받아들이는 절차를 밟을 시 누가 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 어사 대신 대리인이 갈 때의 이득. 이 모든 내용이 쏟아져나옵니다.
그 소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으나 꼭 그런 내용이 필요한 걸까요? 혹시나 이후 관련 내용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나하나 읽어가면서도, 전혀 의미없는 것을 읽는 느낌에 괴로웠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합니다. 이 비슷한 부분이 굉장히 많지요.
4.2
대화의 흐름이 꼬여있습니다. 샛길로 빠진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하나의 화제를 두고 대화가 이루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또 다른 화제로 둘러치다가, 겨우겨우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론을 내리고 대화가 끝납니다.
글의 '기교'라는 면에 있어서는 좀 더 세련된 것일지 모르겠으나 읽는 입장에서는 자꾸 화제가 휙휙 바뀌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따라가기도 힘들고. 한두번 이런 샛길빠지기가 반복되다보면 나중엔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4.3
특정 상황을 설명할 때 역전된 서술방식이 종종 보입니다. 궁금증을 유발하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기는 하겠지만, 반복적으로 사용하다보면 이게 또 굉장히 답답합니다. 특히나 엄청난 설명과 꼬인 대화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입장에서는요.
어떤 '훈련'장면을 묘사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여타 소설이라면 누군가 훈련을 하고 있고, 제3자가 그것을 관찰하고, 훈련 성과의 뛰어남에 감탄을 할 겁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지요. 리트레이스는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누군가가 대단하다며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왜 감탄을 하는지는 안나오죠. 주인공이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뭘 하는건지는 알려주지 않지요. 마지막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하고 있던 것이 특별한 방법으로 행하는 '훈련'이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독자는 이때 비로소 주인공은 훈련을 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4.4
낯설고 복잡한 설정으로 인해 계속 혼란스럽습니다. 물론 리트레이스의 세계관이 정밀하고 뛰어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도 익숙해지려 노력했죠. 품계도 외우려 노력하고, 세력구도도 이해해보려 하고, 여러 기관들의 알력관계나 각종 관습도 머리 속에 넣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안되더군요. 위에 설명한 여러 이유로 인해 과부하가 걸린 저의 뇌는, 하나에 익숙해지기 전에 또다른 두가지 설정이 덤벼드는 상황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5.
작가 입장에서 멋진 세계를 창조했다면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법입니다. 자연의 순리죠. 하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게 되면 독자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절제와 역지사지가 아닌가 합니다. 절제란 건 반드시 필요한 부분과 없어도 되는 부분을 구분함을 말하고, 역지사지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계속 비교하게 되지만, 안테노라 사이크도 같은 경우입니다. 송성준님은 글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리얼한 히스패닉계 조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안테노라 사이크를 읽는 독자에게 그런 이야기는 불필요했던 겁니다. 열심히 조사한 각종 무기, 과학기술, 초능력, 격투기 설정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지만 그게 지나쳤던 겁니다. 진정한 나이프파이팅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독자는 지루했던 겁니다.
리트레이스도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멋진 요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풍성해서, 너무 기교를 부려서 오히려 먹을 수가 없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죠. 지금 리트레이스에 필요한 것은 현명한 다이어트, 그리고 어려운 것을 쉽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6.
어쩌면 독자(=본인)의 수준이 낮아서 작품을 따라가지 못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그런 면이 있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장르소설을 접하는 이들의 수준이란 게 항상 작가가 원하는 만큼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땐 작가 스스로가 눈높이를 적당히 조절하는 것을 배울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먹어보지 않으면 맛있는 걸 알 수 없고, 읽어보지 않으면 재밌는 걸 알 수 없으니까요. 그게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이상으로 기나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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