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웅, 탄생하다.
무협소설은 영웅소설이다. 80년대 무협(1세대무협이라고도 한다)의 주인공들은 독자들의 감정이입과 대리만족을 위해 출생부터 에필로그까지 철저히 영웅적이어야했다. 기재 혹은 귀재라는 수식어가 당연히 붙어야 하는 천부의 재능과 수려한 용모는 기본이고 거기에 불굴의 의지와 각고의 노력까지 더해진다.
성품 또한 인의예지신을 조화롭게 구비하면서도 인간미를 풍기어 심지어 강호의 닳고 닳은 노마두조차 심복하여 스스로 종복을 자처할 만큼 대인배의 면모를 갖추어야 했다. 대의를 위한 영웅의 헌신과 희생은 비록 비현실적이라도 독자들을 감동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였다. 이렇게 완벽하게 미화된 영웅의 모습이 바로 군자의 모습, 초인의 모습이었다.
스토리를 이루는 선악의 흑백구조는 또한 어떠하였는가. 주인공은 언제나 선이고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정의의 실현이다. 상대방은 물론 악이고 불의이다. 이 단순하고 간단한 이분법에 독자는 쉽게 동화되고 몰입한다. 앉은 자리에서 몇시간만에 금방 한질을 해치워버리는 것이다.
독자나 작가나 어차피 삶의 내적갈등이나 인간에 대한 고뇌 따위는 기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멋진 폼을 잡으며 사전에 입력된 프로그래밍을 따라 대미를 향해 전진하는 영웅의 후까시만 클로즈업하면 흥행이 되는 것이다.
2. 비딱해지다
잘나가던 1세대무협이 공장경쟁으로 인한 주화입마에 빠지고 장르가 혼수상태에 빠졌을때 불량한 표정과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좌백의 대도오가 나타났다. 화장빨과 조명빨로 잔뜩 미화된 영웅들에게 식상함을 느끼던 독자들은 전혀 새로운 캐릭터에 열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어려운 용어까지 나왔다. 상상해보라. 자유롭고 거친 무소속 프리랜서 주인공의 등장은 그 당시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대도오를 시작으로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세대 신무협은 파계승, 흡혈귀, 스트리트파이터, 각종 청부업자, 기억상실증환자에 게을러터지고 뺀질뺀질한 주인공까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개성있게 그리기 시작했다.
선악의 이분법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주인공은 더 이상 대의명분에 손발을 묶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고 솔직해졌다. 리얼리티가 강조되고 인물의 본성은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한상운의 초기 걸작 독비객을 예로 들어보자. 기존 무협의 정형성 혹은 패러다임을 사정없이 비틀고 조롱하며 펼치는 난장판속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백호신군 염천서라는 늙고 주책맞은 주인공은 한국무협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개성넘치는 인물로 한국무협 남우주연상 제일 후보일 것이다. 비록 인간적 약점, 원초적 본능에 너무 충실해서 불편하다고 여기는 독자들도 많지만.
어쨋던 2세대 무협은 역량있는 작가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개화했고 성급한 사람들은 조만간 무협소설의 척박한 텃밭에서 문학적, 상업적 열매를 수확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3. 반로환동하다
초고속으로 발전한 인터넷 환경 아래 거대 연재사이트가 잇달아 생기면서 신인작가, 초보작가, 기성작가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모여 들었다. 모니터로 글을 보는 시대, 권력은 마우스클릭에서 나오고 출판은 조회수에 따라 결정 되었다. 퓨전이란 이름으로 무협과 판타지와의 이종교배가 본격화되면서 시장은 청소년 독자들의 입맛에 좌우되었다. 주 독자층의 눈높이에 맞우어 주인공들도 경쟁하듯 젊음의 샘물을 들이키고 다시 탈태환골 하였다.
복잡하게 고민하고 철학하는(?) 주인공은 강퇴되었다. 무슨 올림픽 슬로건 처럼 '최대한 강하고 최대한 단순하고 최대한 통쾌하게'가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다. 신간중에서 아무 거나 한권 골라 10여분만 읽어 보면 주인공의 정신연령과 상태를 알 수 있다. 검왕이나 권왕이나 작가는 다르지만 캐릭터들은 무슨 체세포복제를 통한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싸가지없는 주인공이 역시나 싸가지 없는 악당들을 두들겨 패 버리다 보면 어느새 끝나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신인작가들이 빅뱅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그들에 의해 단순무적 주인공들의 원맨쇼가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산형 주인공들이 그래도 시장을 지탱한다고 강변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무언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렇게 어려지는 독자에 맞추어가면 언젠가는 유치원에 납품할 '무협동화'도 나올 수 있겠다는 망상도 해 본다.
무협소설은 영웅소설이다. 요즘 서로 많이 닮은 주인공들의 모습은 퇴행성치매로 인한 반로환동인가? 아닌면 시장의 변화에 맞춘 탈태환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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