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 무협이 있다면 서양엔 판타지가 있지요.
그리고 SF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허버트 웰스의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을 들 수 있습니다.
<우주전쟁>은 레이저 광선이 밤하늘을 수놓는 스펙타클한 전쟁 소설이 아닙니다.
웰스가 이 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중세의 암흑이 걷히고, 신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세상을 거의 완성하고 있던 19세기 말입니다.
프랑스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를 기치로 혁명이 일어나고도 100년이 넘게 흘렀으나, 유럽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냥해 아메리카 등지에서 짐승처럼 부리는 광기에서 아직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어긋나도 단단히 어긋난 겁니다.
유럽인들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자기들이 믿는 신이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뭔가 핑계가 필요했지요.
그 핑계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진화론이 제공했습니다.
“열등한 종이 도태되는 것은 자연의 원리, 즉 신의 섭리다.”
“흑인 등의 유색인종은 백인과 다른, 열등한 종이다.”
“원숭이가 그렇듯이, 유색인종에게 인권이란 있을 수 없다.”
“야만인을 절멸하고 그들을 가축처럼 대하는 것은 신의 뜻에 합치한다.”
등의 논리였습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던 찰스 다윈은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작가가 일단 글을 쓴 다음에는 자기 작품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학자도 자기 이론이 인류를 어떻게 병들게 하건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지요.
어쨌거나 다윈과 다윈주의는 유럽의 양심을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왕궁에 화장실도 따로 없어 하이힐로 오물을 피하고, 목욕문화조차 없어 향수로 코만 속이던 무식한 유럽인들이, 어쩌다 손에 넣은 기계문명만 믿고 전 세계에서 자행하는 만행을 한 마디로 정당화해 주었으니까요.
<우주전쟁>은 바로 그런 유럽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기계문명’을 지닌 화성인이 침공했다.”
“너희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흑인에게 했듯이 저들에게 절멸 당해 마땅하다.”
“자, 이래도 신의 섭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테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물론 웰스도 지구가 문어처럼 생긴 화성인 손에 무력하게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우주전쟁>이 지금까지 회자될 수도 없었겠죠. 지나치게 불편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지구를 구한 것은 영웅적인 백인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구를 구한 영웅은 바로 화성인에게 전혀 면역력이 없는 박테리아였지요.
유색인종조차 자기들보다 열등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렇게 짓밟던 백인들이, 진화론적으로 볼 때 우열을 논하기도 우스운 박테리아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겁니다.
허버트 웰스의 유산은 미국의 WASP 대통령이 전투기를 몰고 컴퓨터 바이러스로 외계인의 모함을 침몰시키는 형태로 왜곡, 아니 더럽혀졌습니다.
<우주전쟁>을 허무맹랑한 공상과학 소설 정도로만 기억되도록 만들기 위한 음모라고 말하면 지나치겠죠?
하지만 웰스의 시대에도 <우주전쟁>은 그렇게 왜곡되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음에도 그 소설을 읽은 사람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까요.
제국주의의 수탈은 더욱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또한 설정 자체가 허무맹랑하기 때문에, <우주전쟁>은 고상한 귀족들이 읽기에 적합한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에 아편을 팔아 구해 온 홍차에, 아프리카 노예들이 아메리카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을 넣어 마시며 나눌만한 대화가 아니었겠지요.
이것이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을 나누는 심리적 동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귀부인들의 고민, 이를 테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한테 지참금 얼마를 들고 시집가야 제대로 된 인생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오만과 편견>같은 작품은 ‘순수 문학’이 되고, <우주전쟁>과 같은 소설은 ‘장르문학’이라는 말로 폄하되는 이유 말입니다.
한심한 이야기지요.
진실을 말하는데 소재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장자(莊子)가 든 예들은 어지간한 막장 먼닭 소설을 무색하게 할 정돈데요.
“판무 시장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실 “출판 시장의 위기”와 의미가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은하영웅 전설>이나 <사조영웅전> 같은 작품들이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비단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펼치는 가슴 졸이는 모험담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영혼을 울리는 작품에는 언제나 보편적인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잊을 수는 있어도 결코 벗어날 수는 없는 현실이라는 굴레 말입니다.
판무를 비롯한 출판시장의 위기는 문학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려 노력한 결과는 아닐까요? 현실 도피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힘들게 활자를 하나하나 따라 가는 것보다, 영화 한 편 다운받는 게 훨씬 편하고 자극적일 테니까요.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작가들만 탓할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렇게 쓰면 안 팔리고, 안 팔리면 먹을 게 없고, 먹을 게 없으면 그 좋아하는 글쓰기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독자가 작품을 고르듯이 작가도 독자를 고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시험을 부과해 그것을 통과한 독자들에게만 읽기권한을 주자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무작정 많이 팔리기만 바라며 세상 모든 독자의 비위를 맞추려 들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전에 독자층을 선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가하는 무언의 요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일입니다.
작가가 무슨 벼슬이라고요.
그걸 가장 극단적으로 재수없게 밀고 나간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일 겁니다.
걸작 <장미의 이름>이 그런데요, 이렇게 재미있는 책도 처음 100페이지는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와 철학을 한참 읊어 대느라 독자를 아주 미치게 만들죠.
편집자가 에코한테 제안했답니다. 너무너무 좋은데, 처음 100페이지만 어떻게 좀 줄여보자고요.
에코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요.
“우리는 지금 깊은 산 속에 있는 중세의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처음 100페이지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은 그 수도원에 도착할 자격이 없다.”
라며 말입니다.
에코쯤 되니까 할 수 있는 말이죠.
그 말을 따라 힘겹게 100페이지 동안 산길을 오르면, 그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 주니까요.
그럴 자신이 없는 저 같은 하수는 꿈도 못 꿀 발언입니다.
제 눈에는 에코가 사조영웅전에 나오는 동사 황약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도 글을 쓸 자격은 있듯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독자를 고를 권한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자에게 외면당한다고 분노해선 안 됩니다.
자기가 선정한 독자층에게도 외면당한다면 섭섭해 할 일이 아니라 반성할 일이겠지요.
조회수가 낮다고 초조해져서 조회수 높은 다른 글을 읽고 흉내내기 시작한다면 그나마 가진 장점마저 잃는 악수(惡手)가 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야 말로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최초의 한 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반대로 초심과 소신을 잃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최초에 선정했던 독자층이 처음보다 훨씬 넓어져 있다는 걸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글이 세상을 바꾼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 아닐까요?
문피아에 글은 많은데, 인기 있는 글은 많지 않지요.
좌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조함에 고통 받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글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 탓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90퍼센트 이상은 자기에게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자괴감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다수가 항상 옳은 건 아닙니다.
작고하신 SF 풍자 소설의 대가, 커트 보네거트 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작가란 광부가 탄광에 데리고 내려가는 카나리아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요.
일산화탄소와 같은 무색무취의 유독 가스를 먼저 감지하고 목숨을 잃음으로써 위험을 경고하는 카나리아 말입니다.
(죽자는 얘기는 아니고요.)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작품은 결코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이로울 정도로 경쾌하지요.
오해하지 않으시리라 믿지만, 결코 쓸데 없이 무게 잡자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분 좋게 즐기자고 읽는 장르 소설에서 무슨 고리타분한 얘기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소설이 다 진지한 주제를 무겁게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출판시장의 위기에 직면하여,
활자로만 이루어진 매체를 사랑하는 우리가,
화려한 영상과 음악도 없이, 그나마 가진 장점마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길게 한 마디 해 보았습니다.
순수 문학한답시고 장르문학을 무시하는 일부 문인들과 같이 고고한 학처럼 뒤꿈치 들고 걸을 필요는 없지만, "장르문학"을 두 글자로 줄이면 "문학"이라는 자부심을 갖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자부심에 근거를 갖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자 합니다.
연재 안 하고 헛짓한다고 욕해 주시는 독자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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