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인터넷 연재의 함정이랄까요?

작성자
강시우
작성
11.01.24 01:32
조회
1,794

“이번 편지는 여느 때보다 길게 썼습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의 추신입니다.

전보 아니라 편지 맞습니다.

형식에 얽매일 필요 없는 편지를 쓰면서도 분명하고 간결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을 추구했었나 봅니다.

대학시절 은사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똑 같이 내용 없을 바에야 짧은 게 낫지.”

기말 과제를 내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채점하기 귀찮아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의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소설 작법에 관한 이론서는 셀 수 없이 많죠.

중첩되는 내용도 많지만 서로 상충하는 내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소설론뿐 아니라 제가 아는 모든 문장론에 공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파스칼이 말한 그 부분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저도 여러 이론서 중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스티븐 킹도 다른 사람들처럼 ‘위대한 작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종(種) 자체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 자신이 하늘 높이 구름 위에 올라 앉아 있다고 믿지는 않거든요.

글 못 쓰는 사람을 벌레 보듯 하지도 않……는 건 아니지만 좀 덜합니다.

아무래도 그 역시 장르 문학 작가이기 때문이겠죠.

이야기가 산으로 가네요.

본론으로 돌아가서요,

스티븐 킹이 무협지 주인공이 기연을 만나듯이 첫 번째 도약을 이룬 계기는 한 장의 친절한(?) 쪽지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글로 옮겨 닥치는 대로 기고했는데, 그 중 한 편집자가 어린 친구가 기특했는지 조언을 해준 거죠.

‘원고 = 초고 – 10%’

네.

파스칼은 그날따라 10%를 줄일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스티븐 킹은 이야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묻혀있는 화석처럼 발굴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전히 습작 중이지만, 저는 매번 2~30% 정도를 줄일 생각으로 초고를 씁니다.

세상에는 수정이 거의 필요 없는 초고를 만들어내는 고수들도 넘쳐나지만,

저처럼 어설픈 고고학자는 손바닥만한 화석 하나가 묻혀 있는 곳 주변을 포크레인으로 듬뿍 퍼내서 화석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돌을 깨내고 꼼꼼히 흙을 털어내야 하거든요.

초고를 쓰는 건 그 무엇보다도 즐거운 작업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묻혀있는지 궁금해서 열심히 땅을 파지요.

하지만 그 화석을 온전히 드러내는 수정작업은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호밀 밭의 파수꾼’의 저자 J. D. 샐린저는 소설을 한 편 쓰자마자 자기 금고로 쳐 넣어 버리고 곧바로 다음 소설을 시작한다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고를 쓰는 것은 쓰는 이를 위한 일이고, 수정작업은 읽는 이를 위한 일인 것 같아요.

이것이 지금 저의 딜레마입니다.

수정작업은 초고를 쓰고 곧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스티븐 킹은 최소한 6주 이상 묵혀 두었다가, 자기가 쓴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다음에 수정하라고 말하죠. 그 동안 다른 걸 쓰고요.

그런데 저는 10주 이상 내버려 둬야 제가 쓴 글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니까, 10주 이상 지나야 그때부터 제 글이 부끄러워지더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제가 연재하는 게 그날그날 휘갈긴 초고라는 겁니다.

장르 소설 조판 양식에 따르면 한 권에 15만 자 정도라기에 한 권에 20만 자를 기준으로 썼습니다. 5만 자 줄일 생각으로요.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초고는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왜 남에게 보이느냔 말이죠.

사실 그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욱 신나서 쓰게 되거든요.

발굴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단축됩니다.

그리고 발굴한 것을 빨리 자랑하고 싶은 거겠죠.

완전 하수네요.

그렇다고 다 쓰고 다 수정한 다음에 남들에게 보일 수도 없습니다.

장르 소설이라는 게 워낙 권 수가 많으니까요.

한 세 권 쓰고, 네 권째 쓰면서 첫 번째 쓴 것을 수정하고 그것을 공개했어야 하지 않았나, 뒤늦게 후회 중입니다.

연참대전에서 자진 하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창 축제 중인데 초치는 것 같지만, 연참대전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기발한 아이디어와 설정, 스토리만 재미있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순수 문학이 장르 문학을 무시하기도 전에, 장르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가 먼저 장르 문학을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머리 속이 복잡하네요.

초고를 써서 올리는 이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거든요.

계속 즐겁고 싶은 마음과, 10주 전에 쓴 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시점이 맞물려, 답답한 마음에 늘어놓은 넋두리입니다.

덧.

한담이 조금 깁니다.

이제 자야 해서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Comment ' 13

  • 작성자
    Personacon 체셔냐옹
    작성일
    11.01.24 01:35
    No. 1

    공감 1 추가요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1.01.24 01:39
    No. 2

    절실하게 공감합니다. ㅋ
    줄줄 지껄이고픈 말이 많지만 그냥 줄이겠습니다.
    어차피 내용이 없으면 짧은 게 좋으니까요... 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 쵸비
    작성일
    11.01.24 01:42
    No. 3

    .....ㅜㅜ 고작 5편 올린 저 이 지만 벌써부터 1편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네요. 저도 그책 많이 좋아하는데 오랜만에 읽고싶어졌어요..
    ㅜㅜ 근데 자취방에 그 책이 없네.....ㅜ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9 rainstre..
    작성일
    11.01.24 01:45
    No. 4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셨군요.
    다음 글에는 연참같은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상당량 비축본을 만들고 그것을 리메이크하는 방식의 연재.....그런걸로 하고싶다고 해야하나요.
    물론 완벽에는 끝없이 손을 뻗어도 모자라겠지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1.01.24 01:55
    No. 5

    저같은 경우, 같은 글로 세 번째 리메이크 중입니다.
    첫번째는, 100여 편 정도 연재하다가, 무심코 읽어버린 첫 번째 편 때문이였습니다.
    두번째는, 대략 30여편 정도 연재하다 수능때문에 3개월간 연중했다 다시 읽어본 것 때문이였습니다.
    지금 세번째를 연재하고 있지만, 역시나 갈아엎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때문에 항상 고민합니다.
    초고 수정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수정을 거듭한다 한들 좋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수정 전 글을 독자들이 더 좋아하진 않을까.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진 않을까.

    예. '자신이 없다' 라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이런 거지요. 화석을 발굴한답시고 땅을 파고 깎는데, '이게 진짜 화석이냐?' 라는 말에 대답을 못 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juney님의 한담을 보고 나니, 저도 그만 넋두리를 해 버렸습니다.
    한담으로 쓰기엔 부끄러워 덧글로 남기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시두김태은
    작성일
    11.01.24 02:06
    No. 6

    글을 며칠, 또는 몇 달 묵히고 나면 부끄러워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좌절합니다.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글쓰기 레벨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과연 저 때 만큼의 필력이라도 나와줄까 하고 덜덜 떨면서 더욱 좌절합니다.
    몇 주 글을 쉬었더니 그 현상은 더 심합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글을 몇 자, 몇 자 씁니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글 쓰는 게 좋기 때문입니다. 아니, 의무처럼 쓰고 있습니다. 몇 년, 몇 십년이 걸려도 '언젠가는'이란 한 조각 희망을 놓을 수가 없더군요. 저도 넋두리입니다. [먼산]
    글은 계속 쓰면 익숙해질줄 알았는데, 되려 더 어렵더군요. 모두 화이팅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검마르
    작성일
    11.01.24 02:35
    No. 7

    juney님 글을 읽고
    저도 참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되네요.

    아마도 그런 것들 때문에 연중이나 리메이크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초고를 올리는 이 재미에
    너무 빠져서 헤어나오기 싫더라고요.
    제가 많든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는 중독성이 장난이 아니라서...
    저 같은 초보에게는 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흑의노파
    작성일
    11.01.24 02:39
    No. 8

    참 걱정두 팔자네....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지만..지금당장은 세상이 무너져라 고민을 해야겠죠..
    시간이 지나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을지라도..
    추억과 경험.실력으로 남겠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약먹은인삼
    작성일
    11.01.24 07:29
    No. 9

    한담 글을 보고 juney님의 이름을 검색하여
    나르시스에 대한 설정을 읽고
    선작에 추가하였습니다.

    격려할 주제는 아니지만
    늦더라도 언제고 지켜보고 기다릴 독자는 되겠으니
    부디 원하는 글을 펼쳐나가시기를 기대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탈퇴계정]
    작성일
    11.01.24 14:22
    No. 10

    나는 이상하게도
    원고 = 초고 + 50% 가 되던데...
    몇달전에 썼던 소설을 고쳐쓰다보니, 아, 이런이야기를 넣었으면 좋겠다. 이장면엔 이런걸 추가하면 좋겠다.
    이런생각으로 이리저리 추가하다보니까

    원고 = 초고- 10% 한다음에 다시 +60%가 됬음

    120kb 짜리가 수정후 150kb가 되는 신비한 효과... 나는 파스칼처럼 위대한 작가가 되는건 글렀나봄. 쓰면 쓸수록 줄줄나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몽화
    작성일
    11.01.24 16:32
    No. 11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자체가 발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연재는 연재, 출판을 위한 수정은 수정대로 따로 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juney
    작성일
    11.01.25 13:48
    No. 12

    교통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중입니다.
    뜻밖의 방법으로 고민 탈출. ㅋ
    병실이 8층만 아니면 좋겠네요.

    공감 및 응원 모두 감사드립니다.

    꾸벅.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4 최재용
    작성일
    11.01.25 16:01
    No. 13

    헉...입원이라니요 ㅠㅠ
    큰 부상 아니길 빕니다.

    그리고, 연재는 연재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같이 나누는 즐거움,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책으로 나와서 딱 '작품'으로(바르트적인 의미에서, 텍스트의 상대개념으로서의 작품) 고정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게시판과 댓글이라는 유용하고 재미있는 기능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

    아무튼...쾌유를 기원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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