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작은 많은 작품을 쓰자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한 바를 말로 많이 옮겨 보자는 거지요.
다독은 중요하지만 단지 눈으로 활자를 얼마나 훑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글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방점이 찍혀야 합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엮어보면,
"정신은 용수철과 같아서, 지나친 독서는 용수철 저울에 지나치게 무거운 추를 다는 것처럼 정신의 탄력성을 잃게 한다."
라고 쇼펜하우어가 말했습니다.
쇼펜하우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저 말에는 동의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 말은 '무분별한 다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상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 한 권 읽는 데 한 시간 걸렸으면 읽은 걸 생각하는 데 열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취미로 장르소설 읽는 분이 아니라, 취미건 직업이건 소설 쓰는 분들은 장르소설 읽지 마십시오.
한 권 읽고 열 시간 생각할 거리가 없는 텍스트는 읽지 마십시오.
예전에 어떤 직업 작가분이 어지간한 작가들은 2만 권은 읽었다고 자랑처럼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사람이 평생 "책"을 3천 권 읽기도 어렵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한 권,
'은하영웅전설' 한 권,
'묵향' 한 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 권으로 칩니다.
한 작품은 한 권입니다.
눈으로 글자 수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려고 글 읽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담하는데,
장르소설 만 권 읽어도 도스토예프스키 한 권 읽느니만 못합니다.
오해 마십시오.
저는 지금 독자가 아니라 작가 지망생들에게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문피아에 연재되는 소설은 물론이고 요즘 장르소설 안 읽었는데, 요즘 그냥 한 번 몇 개 스캔해봤습니다.
저도 소설을 씁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이런 말 못했을 겁니다.
장르소설로 돈 벌 생각 버렸고, 순수하게 취미로 쓰고 순수하게 취미로 읽고 싶은 마음에 이런 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도 출판은 해봤지만 망작이어서 돈은 안 됐습니다.
그런데 히트작이면 돈이 될까요?
얼마간은 되겠지만, 그래서 떼돈이 됩니까?
돈이 전부인 세상이니 돈 때문에 이렇게 됐다면 이해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요즘 꼬마들 하나같이 노스페이스 입듯이 소설을 씁니까?
20대 중반 이하에게 충고합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기술을 배우세요.
좋은 소설을 쓰고 싶으면 고전을 읽으세요.
한 권 읽는 데 한 달씩 걸리는 소설, 교양서, 이론서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세요.
그러다가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으면 "많이" 메모 해두세요.
그게 다독, 다상량, 다작입니다.
세상에 날로 먹을 수 있는 거 거의 없습니다.
이건희 아들로 태어나지 않는 한.
저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많은 분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이영도 님 작품을 많이 꼽더군요.
그런데 이영도 님도 최고의 소설로 자신의 작품을 꼽을까요?
모르긴 해도 그분도 수많은 고전을 읽으셨을 겁니다.
제 2의 해리포터, 제 2의 드래곤라자를 꿈꾸신다면, 장르소설을 손에서 놓으십시오.
세상에 독사, 서독, 북개, 남제, 중신통이 얼마나 많은데 윤지평한테 무공을 배웁니까?
술이 떡이 된 김에, 장르소설과 장르소설이 눈앞에 펼쳐보여주는 또다른 세상을 사랑하는 어린 후배들에게 한마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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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술취해서 너무 과격하게 써서 지우거나 수정하려고 했는데, 이미 읽으신 분들이 계시니 따로 추가하는 게 낫겠네요.
1. 댓글로도 여러번 변명했지만, "장르소설 읽지 말라"는 말은 문자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주십시오.
고전이 오래된 순수문학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김용 소설과 은하영웅전설, 아시모프와 커트 보네거트 소설 등도 모두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중에는 교양서와 이론서 등 아예 문학이 아닌 것도 많지요.
2. 도스토예프스키 한 권이 장르소설 만 권보다 낫다는 말은 대단히 주관적이기도 하거니와 은유이기도 합니다. 만 권이 아니라 열 권, 훡은 천만 권이라고 썼어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3. 본문 밑에서 넷째 줄 "독사"는 "동사"의 오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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