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냥 심드렁한 마음이었다.
똑같은 주인공, 비슷한 전개. 무가치한, 담긴 것이 하나도 없는 깨달음등이 즐비한 출판용 소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에 이 글을 처음 봤을 때는 1편만 보고 접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3권분량까지 연재를 하고 계시길래. 대체 뭔가 싶어서 보게되었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펠마돈의 비서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소설이었다.
내가 작년에 이 글을 봤을 때는 이 작가가, 이 사람이, 전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주인공은 현실의 우리다. 현실에 가로막혀서, 시야가 좁아지고. 현실에 찌들려져서. 어찌어찌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모른다. 내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았었고, 남 탓을 하기 바쁜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회귀를 함으로서 달라진다. 여기서 제목이 빛이 난다. Spectator. 구경꾼, 관객, 관찰자.
주인공은 여유를 가지게 되고, 삶의 치열함에서 벗어나서 보는 법을 얻게 되며, 그로 인해 달라진다. 현실에 한 발짝 들여놓고도, 그는 바깥에서 현실을 관찰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낼 줄 알고, 사람의 여러 면에 대해서 인정하고, 직시한다. 더 이상 바라는 것만 많은 어린아이같은 치기가 아닌, 하는 만큼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자기자신의 중심을 잡게 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쉽게 찾기 힘든 깨달음을 주인공은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또 바르게 알게 되고 성장했으며, 도리어 그런 전개는 앞서 말했듯이 펠마돈의 비서처럼, 알고 있는 만큼 보이게 했다.
많은 이들이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여유를 가질만한 상황이었음에도, 남을 탓하고, 그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위로를 했을지 모른다.
주인공은 그릇이 크고,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감동했다.
난 현실의 관찰자였다. 난 솔직히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맺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때문에 난 주로 그들이 하는 행동, 말, 눈빛 등등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짚었고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하며 고민해서 바른 인간의 정의를 세운 사람이다.
주인공은 그런 행동 와중에도 자신의 잘못 또한 짚어내는 사람이다.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인간에 대해 심오히 고민하고 관찰한 느낌이 솔솔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읽어보니, 과연... 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있었다. 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각자의 생명체였다. 목표를 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위해, 그 자신이 살아온 삶에 바탕하여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으로 확립된 마음가짐이 들어차있었고, 그런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의 생기가 있었다. 인물들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런 삶을 살아온 자만이 할 수 있는 발언들이 숨겨져 있었다.
많은 소설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소드마스터가 되었음에도 그 행동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보이는 편협함. 포용의 마음 등이, 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진 여타 허수아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이라면, 깨달음을 얻어서 무한한 힘을 얻었다면, 응당 그리 자연에게 그리 허락받은 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은 적이 있다. 요즈음의 일이다.
물론, 그 인물들이 살아오며 얻은 깨달음이 비틀려져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등장시킨다. 목적은 단 하나. 주인공을 위해서.
모든 대부분의 장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주인공을 위해서 만들어진다.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 위해, 자격도 되지 않는 인간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채 등장한다. 단순히 재미를 위했기 때문이다.
조금 반전 있는 전개는 있지만 전체적인 인과율이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으로서, 전체적인 깨달음이 비틀릴 정도의 큰 충격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어느 한계 이상의 힘을 스스로 발휘하지는 못한다.
성륜, 또는 겁륜 과의 계약으로 이루어지거나, 충격으로 인해 비틀린 깨달음으로 악인이 되어있었다거나한다.
절대로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무책임한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항상 무게있고, 자신만의 확립된 가치관이 있으며, 또 그것에만 편협하지 않는 넓은 시야 또한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소설이다.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하게 인생을 살아온, 어떤 사건을 겪은 인물만이 그 발언을 할 수 있다면, 인물들이 그 사건을 겪은 것으로 하여 등장시킨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건, 그렇게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작가의 편협한 시선으로 이루어진 철학을 가진 인물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그 인물들이 얻을만한 깨달음을 간파해서 읆어준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어떤 걸 전하고 싶다면, 그 것이 강제적이거나 강요적으로 보여지지 않게, 너무 들어나게 보여지지 않게, 정말 자연스럽게, 그렇게 삶을 산 인물만이 할 수 있는 발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문피아에서 발견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은 출판할 만한 것은 아니다. 분명 잘 팔리지는 않을 소설이다. 장르시장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조금 더 다듬어진다면, 장르소설을 읽는 평범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들도 자연스럽게 읽힐 수 밖에 없게, 아니면 좀 더 심사숙고해야 뜻을 간파해서 감탄사가 나올정도로,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나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다듬어진다면, 그런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이 절로 이 작가가 자기보다 윗줄의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평을 하게 한다면(사실 지금도 충분히 국내에서는 먹힐 것 같다. 하지만 세계는 넓으니까.)
교보문고 베스트 셀러에는 오를 법한 소설이다.
난 칼럼을 쓰는 사람이 아니고, 누굴 평가하는 이런 글을 쓰는데 익숙치 않다. 두서가 없을 수도 있고, 감정에 치우쳤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을 읽고 밀려오는 불쾌함이 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정말 진흙탕 속의 다이아몬드같은 보석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정말 읽었으면 좋겠다. 이미 읽은 사람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되새겨 읽었으면 좋겠다.
펠마돈의 비서처럼, 가진 바 지혜만큼 보이는 소설이다. 읽고 또 읽어라, 편협함도 없고, 강제도 없다. 이 소설은 보는 것이지. 권유받는 깨달음이 아니다. 작가는 이런이런 생각들이 있다 보여주지. 그것에 대해 강제적으로 권유하지는 않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고, 함부로 남을 바꾸려들지 않는다. 그저 조심스럽게 이러한 방향이 있음을, 관찰자가 보았을 때 인간이 이러함을 보여준다.
우리 자신의 편협함을 없애고, 최소한 그런 시각이라도 없애고 바라본다면, 설사 내가 가진 가치관에 어긋나더라도, 뭐 이런 사람은 이럴 수 있지 라는 마음 가짐이 있다면.
당신은 이 소설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고, 펠마돈의 비서를 엿본 것 마냥 이 소설의 새로운 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줄이겠다. 쓸모없는 개똥 철학이나, 부족한 사회경험으로 인한 정신 이상자의 말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난 그런 말에 신경쓰지 않지만, 듣는 건 좋아하지 않기에 평소엔 이렇게 들어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듯, 내가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싫어도, 아 왜 이런 사회 부적응자. 혹은 관찰자가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런 소설을 알리려하는 지에 대해서라도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도 가져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기를 바란다.
정말로 끝내야겠다. 또 말이 길어졌다. 부디 이 글을 읽고, 나를 욕해도,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부정해도, 이 소설 자체는 부정당하지 않기를 빌어본다. 난 이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을 권유하고 강요적이게 말하고 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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