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는 김체건의 검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上召試之體乾 拂劍回旋揭 踵豎拇而步 상(숙종)께서 체건을 불러 시험하셨는데, 칼을 떨쳐 돌고, 검을 치세워 발꿈치를 들고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걸었다.”
영조 때 문인, 문암 유본학이 쓴 <김광택전>에서는 좀 더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嘗試於御前 眩幻驚人 莫知其端 又布灰於地 跣足用兩拇履灰 而舞劍如飛 舞竟 恢無足跡 其體輕如此 어전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현란한 몸놀림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 움직임을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 양쪽 엄지발가락으로 재를 밟았는데 나는 듯한 검무는 극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그런데 무예도보통지에는 김체건이 통신사를 따라가 일본에서 검술을 익혀왔다고 기술되어 있고, 김광택전에는 왜관에 잠입하여 몰래 검술을 배웠다고 쓰여 있습니다. 물론 두 경우 모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승정원일기(숙종5년 7. 27)에는 당시 훈련대장 유혁연의 명에 의하여 김체건이 왜관에 잠입하여 검술을 습득해왔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赫然曰, 劍術, 天下皆有之, 日本爲最, 我國獨無傳習之人, 心常慨然也。臣欲送一人於東萊, 使之傳習, 府使李瑞雨處, 以劍術可學與否, 觀勢相通之意, 言送矣, 今見其所答, 則以爲似有可傳之路云。臣管下, 有一可學之人, 下送此人, 學劍, 何如? 上曰, 送之, 好矣. 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나라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은 항상 마음에 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신이 한 사람을 동래에 내려 보내 익힐 수 있으면 하고 바라왔습니다. 이에 (동래)부사 이서우(李瑞雨)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알아보라고 말을 전하였습니다. 지금 그 답을 받았사온데, 길이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신의 아랫사람 중에 배울 수 있는 한 사람이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고자 합니다. 어떠하겠습니까?”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좋다.”
또한 숙종실록(숙종8년 10.8)에도 위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기사가 있습니다.
錫冑將奉使往淸國, (……중략……) 仍言訓局軍兵中, 有趫捷有力, 善武藝者一人, 柳赫然在時, 下送東萊, 學倭人劍術, 近者移屬禁營, 請於今行率往, 俾學彼中技藝, 上竝許之. 이때 (우의정)김석주가 사명을 받들고 청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중략……) 훈련도감의 병사 중에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무예에 뛰어난 일인으로서 유혁연이 재직할 때 동래에 내려 보내 왜인의 검술을 배웠으며, 근래에는 금위영으로 소속이 옮겨진 자가 있는데, 이번의 가는 길에 데리고 가서 중국의 기예를 배우게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두 기사를 종합해보면, 김체건은 숙종5년 7월 이후에 왜관에 잠입하여 왜검을 습득하고, 숙종8년 10월 이전에 복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예도보통지 ‘병기총서’에 숙종16년 훈국 내원에서 왜검수의 기예를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는 숙종16년 이전에 김체건의 검술이 훈련도감, 혹은 그 외 군영에 보급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것은 숙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김체건이 왜검을 습득한 것뿐만 아니라 중국에 가서 중국의 검술도 익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제 소설에서는 제가 쓰기 나름이겠지요.^^ 김체건은 한중일 삼국의 검을 모두 통달했을까요?
정규연재 - 검선
http://www.munpia.com/bbs/zboard.php?id=bn_780
숙종과 영조 대에 걸친, 당대 조선 최고의 검객 김체건과 검선이라 불리던 광택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2부작으로, 1부는 김체건, 2부는 김광택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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