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600년 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난다. 스스로 정도전의 후인이라 주장하는 그들에 의해 역사는 변화하는데…….
3934년(1601년) 5월 27일 조정에서는 오랜만에 경연이 시행되었다. 경연은 홍문원과 성균관의 지속적인 요청에 의해 열렸는데 기존의 경연과는 그 맥을 달리했다. 기존의 경연은 홍문원 소속의 경연관이 일부 대신과 함께 왕에게 사서오경을 설명하고 해설하는 자리였는데 이번의 경연에는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한성에 거주하는 일부 유생들까지 참여하는 큰 자리가 되었다. 기존의 유학자 입장에서는 신학당을 학문적으로 벗겨내고 비판하는 자리였고 신학당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널리 알리고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시키는 자리였다. 의례적인 말이 오가고 곧 서인출신으로서 작금의 대표적인 유학자중 한사람인 김장생이 입을 열었다.
“《대학》에서 ‘성(誠)은 실(實)이다.’ 했고, 《중용(中庸)》에서는 ‘성은 진실 되어 허위가 없음을 말한다.’라고 했으니, 성은 곧 하늘의 도이며 성인의 지극한 공효입니다. 결국 성을 추구한다면 실은 온전히 따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허나 전하께서는 성을 외면하고 실만 추구하시니 이것은 겉만 보고나서 정작 중요한 속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왕의 재위 초창기에 열렸던 경연에서 그의 학문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이 했던 강연의 내용이었다. 그 강연을 다소 차용한 김장생의 말에 잠자코 있던 하서진이 입을 열었다. 처음 하서진은 비교적 연배가 지긋한 다른 이를 내보내려 했지만 신학당의 영수라는 상징적인 의미 있는 하서진 이외에는 적임자가 없다는 의견에 결국 그가 맡게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서는 “수학호고실사구시(修學好古實事求是)라 하였습니다. 학문을 닦아 예를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옮음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실사구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학은 결코 그릇되지 않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실사구시의 공부가 작금 피폐해진 조선의 현실과는 맞을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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