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 특히 무협에서 적절치 않은 어휘나 용어들이 사용되는 일이 많군요.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긴 합니다만 어떤 사람들에겐 상당히 거슬리는 편이지요. 잘못 사용된 어휘 하나 때문에 소설 읽기를 아예 포기하는 사례도 있으니까요. 뭐 스토리만 좋으면, 그러니까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작가/독자들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전제하고 나아가다 보면 역시 스스로의 폭을 좁히는 결과가 되지요. 아무리 좋고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기본은 되어 있어야 되지 싶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몇 가지 사례를 꼽아 보았습니다. 주로 무협에 관련되지만 응용하면 다른 장르에서도 발견될 수 있겠습니다.
숫자
물론 아라비아 숫자입니다.
아라비아 숫자는 서술자(작가)가 사용하는 경우와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경우의 두 가지가 있는데 서술자가 사용하는 경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무협’에서 아라비아 숫자는 아무래도 자연스런 표현으로 보이기는 어렵습니다.
5리쯤 가니 객잔이 있었다. 허용
“5리쯤 가니 객잔이 있었습니다.” 불용
하지만 아무래도 둘 다 한글로 (오 리쯤 가니……)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참고로, 숫자를 쓸 때는 뒷말에 붙여 쓰지만 한글로 쓰면 관형어가 되어 띄어 써야 합니다. 예 : 1000명, 천 명)
숫자의 사용에 있어 다른 문제는 기수(基數)와 서수(序數)를 혼동하여 잘못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6명의 흑의 장한이 있었다.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6명’이란 게 무엇입니까. 여섯 명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 하지만 위의 문장을 보고 누가 ‘6명’을 ‘여섯 명’이라고 읽겠습니까. 그냥 ‘육 명’이라고 읽지요. 그렇다고 ‘육 명’이라는 말을 흔히 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여섯 명’이라고 하면 그게 자연스러운 입말이 됩니다.
비슷한 예로 ‘5번째’ 같은 말도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5섯 사람’ 같은 경우는 그저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요. 각각 ‘다섯 번째, 다섯 사람’이라고 써야 바른 표현이지요.
일주일
하도 많은 독자들이 지적함에도 고쳐지지 않는 말입니다. ‘일 주일’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말이고 무협 세계는 기독교와 별 관련이 없으니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라고 자주 지적하는데, 글쎄요……. 더 이상의 할 말이 없군요.
-거라
명령형 어미 ‘-거라’는 ‘가다’ 뒤에서만 써야 합니다. (‘가거라’, ‘올라 가거라’ 등) ‘오다’에는 ‘-너라’가 붙고 ‘하다’에는 ‘-여라’가 붙습니다. 모두 불규칙 용언이지요. 나머지는 ‘-어/아라’가 붙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웬만한 말들은 모두 ‘-거라’를 붙이는군요.
어서 먹거라. 이리 오거라. 말해 보거라.
모두 틀린 말입니다. ‘어서 먹어라, 이리 오너라, 말해 보아라’가 맞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일단은 어법에 맞는 말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한
저도 이 말을 잘못 쓴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애먼’의 잘못된 말이더군요. 요즘 글들의 대부분이 ‘애먼’이 아니라 ‘엄한’으로 쓰고 있더이다.
엄한 사람을 잡는다. → 애먼 사람을 잡는다.
말이란 게 잘못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쓰다 보면 그게 옳은 말로(표준말로)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습니다’가 대표적이지요. 이십여 년 전까지는 모두 ‘-읍니다’로 썼습니다. 그러다 ‘-습니다’로 쓰는 경우가 많아지자 결국 현재 표준어는 ‘-습니다’가 되었지요. ‘엄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제대로 된 말을 써야겠지요.
용과 봉황
흔히 무협에서 ‘일룡 오봉’ ‘이룡 삼봉’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주로 후기지수들의 별호로 붙습니다. 여기서 용은 남자, 봉은 여자를 가리키고 대부분 아무런 무리 없이 넘어가는군요.
그런데 상상의 동물이긴 해도 용은 성(性)의 구별이 없거나 암수한몸입니다. 이건 동서양이 거의 같은 모양입니다. 서양의 드래곤도 저 혼자서 알을 낳더군요. 반면 봉(鳳)은 수컷입니다. 봉황(鳳凰)이라고 할 때 그 봉이지요. 여기서 봉이 수컷이고 황이 암컷입니다.
그러니까 무협 소설에서 암수 구별이 없는 용을 남자에게 붙이고 수컷인 봉을 여자에게 붙여 쓴다는 얘깁니다. 분명 모순이긴 한데 이미 굳어져버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제라도 제대로 사용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관용적 표현’으로 인정해야 할까.
소녀
‘소녀’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여자가 스스로를 가리킬 때, 그리고 타인이나 서술자가 등장인물을 가리킬 때. 첫 번째는 ‘소인’, ‘소자’, ‘소신’ 등과 같은 용례이므로 크게 나이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즉 어른이라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윗사람에게 스스로 ‘소녀’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할머니쯤 된다면 어색하긴 할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는 대상의 나이에 맞게 써야 합니다. 본디 ‘소녀’란 ‘나이 어린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초경을 하기 전, 그러니까 약 15세 이전의 여자아이에게만 쓸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무협소설에서는 17, 8세는 물론 20세 이상의 처녀에게도 소녀라는 말로 지칭합니다.
사실 엄격히 따지면 과거 봉건사회에서 ‘소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에 ‘소년(少年)’이 남자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본디 성 개념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지요. 남성 위주의 사회이니 주로 사내아이를 가리켰으나 여자아이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소녀’란 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 역할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의 어린아이는 남녀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서양 중세에 어린아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동양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이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유아사망률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을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웠던 것이지요. 물론 같은 아이라도 귀족 이상과 평민 이하는 달리 취급되긴 했습니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독자는 몰라도 ‘작가’라면, 스스로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스스로 ‘글쟁이’라고 낮추어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家)’든 ‘-쟁이’든 그 말 속에는 어느 정도 ‘전문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인터넷 좋다는 게 뭡니까. 포털사이트에서 자신이 쓰려는 단어만 검색어로 쳐 넣으면 그게 옳은 말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습관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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