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연성이라는 말은 문학 용어가 아닙니다.
소설의 3요소, 문학의 3요소 이런 데에 개연성이 들어가나요?
안 들어가죠.
그냥 당연한 것입니다.
개연성은 원래 확실성, 가능성 등의 뉘앙스를 풍기는 말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서는 ‘일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감.’, ‘억지스럽지 않음.’을 뜻하죠.
개연성은 문학에서 따져오지 않았습니다.
문학은 상상의 세계입니다.
걸리버가 소인국을 거인국을 말의 나라를 여행해도, 엘리스가 토끼 따라 이상한 나라에 가도,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심봉사가 눈을 번쩍 떠도, 제비 다리 고쳐주고 박씨 물어다 줘도 어느 누가 개연성이 없다는 비판을 합니까?
지금 ‘장르 문학 읽는 눈’으로 이런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면, 아주 악플이 넘쳐날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죠. 문학에서 말하는 소위 ‘개연성’ 즉 억지스럽지 않음은 글 자체, 그 세계 안에서 자연스러움을 뜻하는 것이지, 현실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 글 속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은 글 안의 설정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더라도 ‘왜 그럴까?’,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 하고 독자가 생각해보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태백산맥을 읽으며, 아니면 공지영, 신경숙 등 유명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개연성’을 따지는 사람 보셨습니까? 이런 글들을 읽으며 어느 누가 개연성을 따집니까?
혹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무슨 의도일지를 독자들이 곰곰이 생각해보고 감흥을 얻습니다.
무협, 환타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또한 상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입니다. 개연성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김용 소설 보고 개연성 따집니까? 반지의 제왕 보고 개연성 따집니까? 그렇다고 이 글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완벽해서, 흠잡을 곳이 없어서 따지는 사람이 없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완벽’은 없습니다.
유독 장르문학, 그것도 ‘한국’ 무협, 판타지에 대해서만 개연성을 따집니다. 엄격하게 쳐다봅니다.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실수를 용납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들 잘 아실 겁니다.
저급 책들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개연성 이전에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 전개, 남발하는 기연에 독자들이 물린 겁니다. 작가가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글 솜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틀린 맞춤법 등 작가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합니다. 독자의 눈은 엄격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독자 책임입니다. 무협, 판타지야 그게 그거지 하고 이미 생각하고 들어갑니다. 수많은 무협을 읽었고, 수많은 판타지를 읽은 독자는 나름의 무협,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맞지 않으면 개연성 없다고 합니다. 새로운 설정은 참패하고 맙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장르문학’에서 ‘개연성 없음’은 “좀 억지스럽지 않아요?”, 혹은 “약간 부자연스러운데요?”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엉망진창’, ‘쓰레기’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르문학도 문학입니다.
상상의 세계입니다.
‘논리’를 펼치는 곳이 아닙니다.
굳이 개연성을 따지지 않습니다.(글은 ‘당연히’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이 일은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될 확률이 70%로군.” 할 겁니까?
사람의 경험, 배경지식이 다 다른데 어떻게 개연성을 따집니까?
다만, 작가는 자기 글에 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장은 기본이고, 억지스러움을 제거해야합니다.
많은 공을 들여야 좋은 글이 나옵니다.
독자는 이미 구축된 엄격한 자신의 세계로 글을 보지 말고, 글 자체를 봐야 합니다.
‘그게 그거지, 뭐.’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귀찮더라도 자신이 구축한 기준이 아닌, 글 자체를 기준으로 글을 봐야 좋은 글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같은’ 글들만 나올 겁니다.
혹 의아하더라도, 현재 거의 ‘쓰레기’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개연성’이라는 말 대신,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해주셔야 합니다.
문학을 읽으면서 개연성을 따지는 현실이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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