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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52 녹슨
작성
05.08.25 12:24
조회
1,100

이 시대에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죄악이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은 기본적인 축기를 마친 그 시점부터 국가정보원의 내공 디텍터들이 24시간 감시를 붙고

살인도구를 항상 소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가벼운 폭력시비에 휘말리기만 해도 기본이 구속인데다가

공공장소에서 무공을 익히거나, 시전하는 것도 금지.

무공을 사용하여 일반인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공공기물을 훼손할 경우 최하 벌금 1000만원 혹은 징역 1년에 처하고 볼 것도 없이 형사사건으로 취급.

무공을 사용해 도청과 같은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2년간 면벽에 처한다. (쉽게 말해서 무림인 수용소의 독방에 처넣는다는 말이다)

무공을 지닌 범죄자를 상대하는 경찰들에게는 발포가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되며

특히 무림인 전담반 같은 자들에게 걸리게 된다면 체포과정의 즉결심판으로 무공이 전폐될 수도 있다.

그뿐인가...?

주화입마와 각종 비과학적인 이유때문에 생명보험 가입조건도 까다로운데다가

군에 입대라도 하게 되면 빼도박도 못하고 특전사나 모종의 기무수사대에 자동으로 편입되어 남들보다 몇년은 더 썩어야 하고

제대를 한 후에 예비군 훈련을 받는 일조차 무슨 생명을 걸어야 한다고 들었다.

설사, 모범적이고 성실한 성격을 가져서 아무 사고를 치지 않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관공서에 제출한다거나

주민등록증이나 이력서같은 쪼가리들에도 자신의 독문무공에 대한 내용을 낱낱히 적어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닐 것이다.

단지 무공을 익혔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모든 사생활이나 일탈의 욕구들을 검열받아야 한다는 것.

국가에서 무림인을 다루는 절차는 흡사 예비 범죄자를 다루는 것과 같아서

제정신이 박힌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무공같은 것은 줘도 안 가지는, 허울좋은 그림의 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무공을 가르치고 싶다구요? 영감님."

"그렇다니까? 자네는 정말정말 보기드문 최상의 근골을 가진게 틀림없어. 그 뭐랄까... 일월천룡극양신무일발역전로또지체...랄까. 하여튼 지금도 많이 늦기는 했지만 자네라면 30세 이전에만 무공에 입문하면 순식간에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네."

힘겹고 지루한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 노인.

혹시 껌이나 손톱깎이를 팔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것을 뛰어넘는 최악의 귀찮은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20세기의 행인들을 휩쓸었던 최강의 귀찮은 트렌드 "도를 아십니까?"를 대체하며

21세기에 새로운 유행으로 다가온 귀찮음 브랜드. "무공을 아십니까?"

내 좌우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어느덧 나를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휴..."

과거의 "도를 아십니까?" 감염자들은  '불특정의 최대다수'를 추구하는 일종의 선교집단으로서 눈앞의 귀찮음만 이리저리 잘 피해다니면 예방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에 비해

지금 내가 마주치고 있는 '무공 인플루엔자' 감염자들은 일단 한놈만 찍어놓고 죽어라 귀찮게 구는 21세기의 신종 불치병이라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이 나를 계속 쫒아오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제길.

"할아버지. 저 무공에 관심 없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내 머리속으로는 정부의 부실한 무림인 관리와,  이사람이 진짜 무공을 익힌 거라면 국정원 사람들이 어디선가 이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 이 영감에게 집 주소라도 들키는 날이면 인터넷에 가끔 올라오는 무림인의 스토킹 사건사례를 내가 몸소 갱신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들이 맞물려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제게 절대로 무공을 익히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거든요?"

물론 거짓말이다. 아버지께 들어온 젊은 날의 할아버지는 무공에 미쳐서 일년 중 6개월 이상을 무공을 찾아다니는 데에 인생을 허비하셨다고 들었다.

물론 무공이라는게 재능이 없는 이에게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가파른 금역이라는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우리집 가훈이 -무공반대- 랍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내가 무공에 대해 지극히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무공을 선망하는 만큼 아버지가 느껴야 했던 고난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긴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집안은 내팽개치고 맨날 무공에 빠져서 살았으니 할 말 다했지.

하여튼 어린날의 경험으로 아버지는 무공에 대해 일종의 적개심을 가지시게 되었고,

그로인해 내가 무공이라도 배우는 날에는 잘하면 다리몽둥이가 부서지거나 집에서 쫒겨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거다.

한마디로 난 무공이 싫어요, 이 영감님아!

"그렇게 듣지 말고 잘 생각해보게. 무공은 말이야..."

- 이번 역은 신도림, 신도림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방송이 들리기 무섭게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지하철을 뛰어나오고 말았다.

가끔 뉴스를 보면 무공을 익힌 사람 누구누구가 무슨무슨 범죄를 저질러서 경찰은 체포과정에서 발포, 사살했다는 내용이 심심찮게 보이곤 한다.

무림인이라는게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나도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림인에 대해 막연한 동경과 거리감을 느끼며 20대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림인에 대해 정부가 처우하는 규제는 가혹하리만치 엄정했고, 무림인들도 미친게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생존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겪는 경험은 보통은 잘 안하는 거겠지...? 응?

"아하하... 저기 영감님.."

"왜 그러나 청년?"

"그게.."

이 영감을 달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판단에 엉뚱한 역에서 내린 것까지는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좀 귀찮긴 했지만 '무림인을 만났을 때 취해야 할 행동 28가지' 라던가 '무림인을 따돌리는 방법' 같은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나에게는 그리 위기상황이 아니었다.

문제는 밥이라도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한적한 분식집으로 걸음을 옮기던 찰나,

이 영감이 내 뒷덜미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툭 하고 찍어버린 것이 시초였다.

몸이 찌르르 하면서 움직일 수 없었고 어느새 영감은 나를 짊어지고 이상한 창고같은 건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 창고는 이상하게 청결한데다가 알수없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고 나는 하얀 시트가 덮여있는 침대에 몸을 뉘이게 되었다.

그때쯤 생각났던 정말 재수가 제대로 없을거라는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으며 영감은 수술용도구와 메스를 꺼내들었고

결정적으로 영감이 착용한 푸른색 마스크를 보며 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영감, 나를 수술하려고 하고 있어??

태연한 말투로 대꾸하는 영감을 보며 나는 '무림인들은 대부분 미쳐있다'는 속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설마 지금 들고 있는 칼로 저를 어쩌시려는건 아니시겠죠? 저는 집에 돌아가야 하고 내일은 여자친구랑 약속도 있는데다가 지금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실텐데.."

영감은 눈꼬리를 가늘게 만들며 웃었다.

"걱정 말게나 청년. 자네는 이땅의 무공발전을 위해 아주 약간의 희생만 하고 나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여자친구와 즐거운 데이트를 할 수 있을테니까."

"히익..."

미쳐있다! 이 영감은 정말 확실하게 미쳐있어!

엄습해오는 막심한 절망감과 공포로 나는 눈물을 흘릴수밖에 없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할아버지! 저 정말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아니 이제부터라도 착하게 살게요. 엉엉엉..."

"걱정하지 말라니까..."

영감이 메스를 핥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저 영감은 의료시술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없나? 인체에 상처를 내는 도구에 침을 묻히면 어쩌겠다는 거야!

미쳐버릴 듯이 무서워서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영감은 서슴없이 다가와서 내 셔츠를 메스로 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나는 탄탄하지 못한 상체를 늙은 남자에게 공개하는 자세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오, 역시 젊음은 좋구만.."

애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때였다, 이 말도 안되는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콰앙! 하는 굉음이 실내를 울렸고 나는 이 와중에서도 눈동자를 돌려서 창고의 철문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중절모에 바바리 코트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 사람이 문을 부순 모양이었다. 저 사람도 무림인일까?

"누구냐!"

영감이 소리치며 메스를 던졌다. 그것은 정확하게 날아가 중절모를 창고의 석벽에 꿰뚫어버렸지만, 모자의 주인은 한걸음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영감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나는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별다른 특색이 없는 중년의 남자라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찾았다..."

남자가 나직하게 말하며 영감을 바라보았다. 영감은 남자가 메스를 피한 것이 의외인지 남자쪽으로 자세를 잡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잘도 숨어다녔구나, 식인마 지천명."

영감이 지천명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을 가진것과는 별개로 나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이 영감, 수술이 아니라 나를 먹으려고 한거였어?

알 수없는 괴리감에 허우적대는 나와는 별개로 남자와 영감은 몸을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남자의 주먹이 맹렬하게 허공을 갈랐고, 영감의 주머니 어디선가에서는 끊임없이 메스가 등장해 남자의 급소를 노렸다.

눈동자를 돌리는 각도에도 한계가 있어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윙윙하며 공기가 울리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남자도 역시 이상한 힘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무림인이겠지.

잠시 후 퍽 하는 소리가 들렸고 영감의 몸이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쳤다.

쾅 하며 벽에 붙어있는 영감을 향해 격돌한 남자의 주먹은 영감의 배에 정확하게 틀어박혔고 그것으로 싸움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남자는 손을 탁탁 털며 나에게 다가왔다.

"식인마의 사냥감이었나? 자네도 운이 없군."

피해자, 와 같은 좀 더 정상적인 표현을 할 수는 없는거냐!

"그.. 그러게요.."

남자는 마비된 몸을 풀어주며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눈이 이채를 띄는 것이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일월천룡극양신무일발역전로또지체? 식인마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나?"

"예...?"

"크큭.. 지천명도 아깝게 됐군. 오늘이면 대법이 완성되는 날이었을텐데. 막판에 모든게 날아갔으니."

"......"

남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영감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금강이라고 한다. 별로 밝히고 싶진 않지만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 사문의 율법이라서 말이야. 일단 자네도 내 이름을 알고는 있게."

순간 할아버지의 유품이라 아버지가 차마 버리지 못한 책자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들 중에는 '무림인명록' 이라는 책도 있었고 금강이라는 사람은 그 책자에 등록되어있던 사람인 것이다. 그것도 첫번째 챕터에!

"다.. 당신이 무정권 금강? 한번 떨치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치며 정치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마피아가 먼저 악수를 청한다던...?"

"아아.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내 별호는 무정권이 맞다."

생전 무공과는 연관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내가... 고무판이라는 무림의 결사단체에 얽혀들게 된 사연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몰랐다..

이제부터 내가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두둥. 녹슨 고무판 입문기. 계속될 확률 아마도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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