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팔리는 글’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잘 쓴 글’이어야 하겠지만, 모든 ‘잘 쓴 글’이 ‘잘 팔리는 글’이 되는 건 아니겠죠.
솔직히 말해보세요. 당신이 유료 결제를 하는 글 중에 ‘양판소’라는 오욕에서 벗어날 만한 작품이 몇 개나 되는지.
회귀. 환생. 게임 시스템. 서클 마법. 소드 마스터. 재벌. SSS급..... 이런 것들을 버무리고 볶아낸 양판소 중에서 ‘잘 쓴 글’이 바로 ‘잘 팔리는 글’이 되는 거겠죠.
작가들이 죄다 양판소만 써댄다고 욕하지만, 그런 현상의 책임에서 독자가 완전히 자유로울까요? 독창적인 소재 궁리해서 열심히 썼는데 조회수 1~200 간신히 나오고 그러면 누가 힘들게 고민하겠습니까. 남들 다 하는 대로 주인공한테 게임 시스템에 회귀에 SSS급 스킬 하나 던져주면 끝인걸.
제가 소개하려는 ‘흑마술 일기’는 ‘안 팔리지만 잘 쓴 글’입니다. 작품의 수준과 재미에 비해 조회수는 처참한 수준....이죠.
읽다 보면, 글의 내용이나 캐릭터 성격의 호불호는 갈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작가님의 필력이 대단히 우월하다는 점은 부정 못하실 겁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각설하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기 형식입니다. 그런데 사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인공이 뭔가 대단한 흑마술서를 획득하고 해독합니다. 근데 언데드 일으키고 데스 나이트 제조하고 이러진 않습니다. 주문을 외워 불을 일으키는 대신 라이터와 버너 씁니다. 얼음이 필요하면 냉장고를 열고요.
주로 마법 약을 만들거나 마법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면 서클의 마력을 끌어올린 후 수학 공식을 풀고 영단어를 외치는 대신 투명 램프를 제작합니다.
마법 약을 제조하기 위해 동네 뒷산을 뒤지고, 고양이 눈알을 구하려다 고양이를 구하기도 하고.
분명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현실감을 줍니다. 왜냐면 저런 미신은 실제로 존재하니까요.
흔하잖습니까?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마녀가 도마뱀 꼬리와 개구리 눈알과 기타 여러 약초를 솥단지에 넣고 푹 끓이니 신비로운 약이 탄생했다! 이런 거. 그게 실제로 일어나는 상상하는 건 다들 한 번쯤 해봤겠죠. 오컬트 샵이라든가 하는 게 있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이 모두 정상에서 약간씩 벗어났습니다. 다들 똘기발랄해요. 그게 서로 맞물려서 웃음을 줍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대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황당한 오해와 착각이 빚어내는 웃음도 상당하죠.
그런데 사실 저런 묘사가,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주인공이 또라이인 걸로 끝이겠지만 흑마술의 마력에 홀려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가정하면 글의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작가님의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해도.) 몽환적이고 오싹해집니다.
말했듯 병맛개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웃음코드가 많습니다. 좀 심각해지려나 싶다가도 누군가로 인해 분위기가 반전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막상 등장인물들의 주변 환경을 살펴보면 되게 암울합니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촛불 하나가 위태롭게 빛나고 있는 듯합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기에, 어쩌면 그걸 노린 작가님의 서술 트릭일지도 모르겠네요.(그냥 제 망상일 수도.)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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