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망겜에 갇힌 고인물은 느낌이 좀 다릅니다. 로그라이크이기 때문에 죽으면 능력치도 기억도 의미가 없어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어떻게든 층을 진행하기 위해선 그야말로 철저하게 시스템을 파해치고, 응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셈이죠. 물론 수없이 클리어를 시도하며 몸에 베인 기술도 만만찮긴 하지만, 베이스가 되는 스탯이 갓 게임에 빨려 들어온 완전 초기 상태라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능하기 위해선 바탕이 되는 게임이 확실하게 구상되어 있어야 할 텐데요, 주인공의 독백이나 설명으로 드러나는 게임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작가님 머릿속에 명확하게 구축된 게임 하나가 통째로 들어있고, 이 세계는 그 게임 룰 아래에서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어떤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전달하기 위해 독백에도 상당 부분 지면을 할애합니다. 불편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고인물이라는 걸 와닿게 해주는 장치죠.
게임 설정 자체도 꽤나 독특합니다. 각 층 자체는 여러 시대 상, 여러 세계관들이 랜덤하게 뒤얽혀 구성되지만, 아래층에서의 행동이 이후 층에 영향을 끼치는 등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매 회차가 독립된 세계인 양 구성됩니다. 어떤 회차에서의 오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족 단위의 오크일 수도 있지만, 다른 회차에서는 이족보행병기를 타고 다니는 우주연방 오크와 마주칠 수도 있는 거죠. WAAAGH!!
스탯과 스킬도 그냥 상태창으로 툭툭 찍는 게 아니라 중앙으로부터 스탯을 찍으며 가지를 뻗어나가면 현재 스탯이나 소지하고 있는 장비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반영되어 랜덤한 스킬이 짠 하고 나오는 방식입니다. 물론 주인공은 이런 시스템을 바닥까지 꿰고 있고, 거기에 맞게 전략을 수립하여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기술적으로 스탯을 찍습니다. 전투 와중에도 어떤 스킬이 필요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조건까지 순식간에 맞춰가며 스킬을 뽑아내는 장면은 정말 고인물이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매 순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설정 상 자칫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데요, 주인공의 나름대로 유쾌한 만담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이를 훌륭하게 커버합니다. 한 마디로 적당히 다크하고, 적당히 유쾌합니다. 캐빨이 주인 작품은 아니지만 캐릭터들도 꽤나 매력적으로 뽑혔습니다. 메인 히로인은 성격이 좀 독특한데 개연성도 있을 뿐더러 오히려 그게 매력이고, 최근에 등장한 여신님도 매우 귀엽습니다. 개새끼야! ;ㅅ;
이 작품은 고인물 타이틀을 달고 있긴 하지만 능력치나 피지컬로 다 쓸어담는 장면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그보단 실제 고인물에 가까운, '아니 저걸 저런 식으로 할 수 있단 말이야...?' 하고 감탄할 만한 방식을 보여주죠. 여러 다채로운 설정들과, 그 설정들을 디테일하게 살려서 활용하는 방식이라 그런 방식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1. 생각 없이 걍 능력치로 죄다 쓸어담는 고인물은 싫다! 좀 고인물다운 고인물이 보고 싶다.
2. 뻔한 설정의 탑 등반물 말고 좀 신선하고 독특한 설정의 탑 등반물이 보고 싶다.
3. 주인공이든 적이든 좀 똑똑했으면 좋겠다. 서로 막 머리 굴리고 심리 예측하고 했으면 좋겠다.
4. 너무 무거운 건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기만 한 것도 별로다.
5. 튜토하드 재밌게 봤다. 그 분위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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