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오채지
작품명 : 혈기수라
출판사 : 파피루스
도발적인 제목밖에 떠오르지 않아, 기분이 상하신 분이 있다면 우선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척 호감이 가는 작품인지라 더 격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명확한 이미지 전달을 위해서 존댓말을 생략하오니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후... 일단 심호흡을 하자.
소설을 모니터로는 잘 읽지 못하는 관계로 문피아에서의 활동은 별로 하지 못했지만, 우연히 오채지작가의 신작을 발견하였고 선호작에 추가하였다.
'혈기수라' 라는 제목의 무협이 연재되는 동안 무척 즐겁게 읽었으며 개인적으로 오채지의 대표작에 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출판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혈기수라 1권을 무릎에 올려놓고 글을 쓰고 있다.
후... 다시 심호흡을 하자.
그래 솔직히 말하자.
혈기수라는! 그렇게 재미있었던 혈기수라가!
재미없어졌다.
누구의 잘못인지 독자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연재중엔 그렇게도 흡인력 있었던 소설이... 완전히 망쳐졌다.
★★★★짜리 별점을 주고 싶던 혈기수라가 ★★짜리 소설이 되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라서 몰입이 덜 되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책을 읽을 때 자세가 좋지 않아서 무의식중에 불편한 감각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이야기 자체가 변질됨에 있다.
똑같은 등장인물이 똑같은 스토리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왜 갑자기 재미없다 말하느냐고 하신다면...
이건 출판사 잘못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위화감은 처음 10페이지부터 시작이었다. 아니 10페이지부터 시작하니까 20페이지라고 해야 하겠구나.
이 열받음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스포일러가 필요하니 양해해주길 바란다.
연재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명을 위해 요약)
1. 삼류 칼잡이 네명이 객점에서 도박을 하고 있다.
2. 그 중에 한명이 사기를 쳐서 돈을 딴다.
3. 흐뭇한 사기꾼이 객점 입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라 얼어붙는다.
4. 고리대금업자가 들어오고 있다.
5. 그 고리대금업자는 아주 무섭고 독한놈이다.
6. 하물며 사기꾼은 그에게 거금 일천냥을 빚지고 있었으니...
사기꾼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흘러가기에 이 부분은 대단히 몰입되는 장면이다.
사기꾼의 걸죽한 입담과 더불어 뻔뻔하고 얍삽한 삼류 칼잡이의 코믹한 도박 한판, 그리고 닥쳐오는 위기.
이 부분이 출판되면서 약간 수정되었다.
6. 하물며 사기꾼은 그에게 거금 일천냥을 빚지고도 갚을 생각을 안했으니...
아주 약간의 수정을 통해 위기감이 사라진다.
1> 돈을 갚을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면 고리대금업자를 만만하게 생각하나? 그럼 왜 보고 얼어붙었지?
2> 별볼일 없는 칼잡이가 그 대단한 고리대금업자의 돈을 갚을 생각을 안했다?
사실 별볼일 없는 칼잡이는 뭔가 대단한 녀석인가? 그럼 위기가 아니겠군. 그게 아니라면 혹시 아직 갚을 때가 아닌가? 그럼 위기가 아니겠군.
3> 그 무서운 놈의 돈을 갚을 생각도 안하고 있다는건 평범한 상황이 아냐. 무협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등등 별 생각이 다 든다.
토씨 하나가 달라짐으로서 '급박한 장면'이 '무협적인 클리셰'로 변질되어버렸다.
'보잘것없는 도박꾼의 위기'가 '한 칼 숨긴 도박꾼의 번거로운 상황'이거나 '겁없는 채무자와 흉폭한 채권자의 만남'이 되었다.
이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와는 별개로, 문장 하나를 쓸데없이 수정한 결과 독자의 몰임감을 깨뜨리는 결과가 따라오는 것이다.
돈 갚을 생각이 없었다는 건 읽다보면 누구나 다 알게 된다. 하지만 그걸 굳이 하필 그 시점에 밝힘으로서 그 이후의 갈등묘사를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절묘한 한 수.
이런 자잘한 수정이 너무 많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연재분에서 하던 반말이 출판되며 존댓말로 수정되는 과정에서 어색한 대사가 생긴다.
연재본 : 좋아. 기분이다. 이천냥 다 줄게.
출판본 : 기분이다. 이천냥 다 드리죠.
말투가 어색해졌다.
생각해보면 열받는건 한두군데가 아니다.
표지를 보자.
푸른 무복을 입은 무인이 활기찬 자세로 푸른 산맥을 바라보는,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제목을 보자.
혈기수라.
이게 제목이랑 표지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어디가 혈기 어디가 수라냐...? 뭐 이런건 넘어가자 너무 시시콜콜해보이니까.
띠지를 보자.
- 이제 한 소녀를 위해, 마중걸 그가 칼을 들었다.
아 식스센스라는 영화 홍보할때
- 유령 역할을 맡은 브루스 윌리스의 탁월한 연기!
하는 소리 들은 기분이다.
뺀질하고 뻔뻔하게 등장하는 마중걸이 알고보니 뭔가 있더라, 하는 쾌감을 띠지에서부터 차단하며 들어간다. 왜 싸우는지도 이미 안다. 한 소녀를 위해서다.
뭐 이런것도 넘어가자 독자들을 끌려면 이런 홍보도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냥
반말 찍찍 싸고 넉살과 무례함을 넘나들며 듣는 사람 은근히 기분나쁘게 만드는 마중걸이
가슴아픈 과거가 있는 유머러스하고 준수한 미공자가 되어버린 것에 묵념하며 20페이지만에 읽기를 포기한다.
그래도.. 그래도.. 근래 출판한 무협 중에서 수작에 꼽힌다고 생각하므로 추천하는 바다.
추가 : 이 글 올려놓고 혼자 끙끙대다가 다시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출판삭제 된 이후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또 추가 : 재밌네요
또 추가 : 작가님이 왕림하시어 오해가 풀렸네요.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기념으로 돌을 던져드립니다. ㅎㅎ(돌 달라고 하시기에..)
작가님의 선택에 의한 변동사항이기에 이제 불평할 수가 없겠군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로 하여금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낳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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