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톨킨
작품명 : 반지의 제왕
출판사 :
얼마전부터 "반지의 제왕"에 대한 고찰에 들어갔다. 절대악이라는 사우론과 그의 동조자 살루만 등으로 보여지는 악과 아라손의 후예 아라곤과 절대반지의 파괴 임무를 가지고 떠나는 프로도 진영으로 나누는 선의 진영.
그러나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선과 악의 대립과 선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권선징악'적 결론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헤세의 인간관이 드러난다. '데미안'에서 보여주는 '아프락사스'적 인간.
선과 악을 가지는 어떤 쪽이든지 완벽할 수 없는 신으로 대변되는 인간형. 그러한 인간의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골룸이라는 인물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배우이며 이 작품의 작품성을 끌어올린다.
다시 작품을 살펴보자. 절대권력을 준다는 '절대반지'를 만들어내는 사우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러한 반지를 끼고서도 패배한다. 그렇다면 이 반지는 절대권력을 주지 못한다는 그 존재 자체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지가 파괴되지 않고 있던 것은 절대권력을 준다는 그 사실무근한 전설. 그 전설이 반지의 소유자 내부의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잠재되었던 악을 실체화 시킴으로써 사우론과의 교감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반지는 그 자체로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사우론에게 돌아가려는 귀환적인 목적을 가지기 보다는 반지 소유자 내의 악을 실체화 시키는 동시에 거대한 정념체이던 사우론이 인간 사이에 분열을 획책하는 매개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가 그 스스로 완벽한 권력을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그것은 확실하다. 절대권력을 탐한 그 누구도 절대권력을 누리지 못했으며, 사우론에 귀환한다고 할 지라도 그 반지 자체는 완벽한 절대권력을 부여한다기 보다는전설의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 가지는 절망감에 호소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반지 파괴의 정당성이 형성된다.
절대반지가 가지는 악의 실체화. 즉 반지의 제왕은 반지가 실체화시킨 악을 이겨내고 선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스토리 자체를 거시적으로 보아도, 미시적 인물적 으로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반지가 없어지면 사우론이 죽는다는 그런 것은 실상 중요하지 않다. 반지가 주는 내부욕망을 이겨내고 선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톨킨은 환타지라는 패러다임을 인간 내부의 욕망과 열정을 구분해 내고 그 욕망을 달성하는가,혹은 열정을 달성하는가에 따라서 인간 자체가 가지는 모순적이면서 본능적인 존재로써 새로운 공간 새로운 종족이 있는 '환상'으로 고찰하고자 노력했다.
환타지적 상상력이 톨킨에 그 살을 붙이면서 다양한 종족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공간적 배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럽의 중세시대를 그리고 있어서 공간적 환상성은 퇴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종족이란 것 역시 다양한 각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적 가치를 고찰하는 방법이지만, 오히려 종족들은 주인공인 인간을 돕는 부수적 존재로 내세움으로써 기독교적인 이분법적 존재론을 답습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누구도 완벽한 선, 완벽한 악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마족' 혹은 '신족'이라는 새로운 종족의 등장은 가쉽거리적 환타지로써의 전락을 가져왔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정형화 되어버린 환타지 소설은 그 환타지가 가지는 의미. '상상'이라는 자유로움을 앗아가 버렸다. 여러 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환타지는 불과 수삼년만에 그 한계를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작가들은 가쉽거리로 전락해 버린 환타지의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순수문학과 그 가시적 거리를 좁히려 애쓰기도 한다. 환타지를 즐겨보는 애독자로써, 한계를 보여주는 환타지 작품들 의 신선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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