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갔습니다.
원래 목적은 자료조사였습니다만, 다른 길로 새는 게 특기인 저한테는 그러한 목적이야 순식간에 제 뇌리에서 후순위로 밀려났죠.
옛날에 학생 때에는 시험기간이라고 도서관 가겠다면 부모님께서 말렸습니다. 가서 또 책만 읽다가 놀면서 온다고.
아니나 다를까, 가는 길 옆에 한국문학 표지가 붙어있는 서가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몇 권의 책들을, 지금은 추억 속의 책들을 발견했습니다. 세로꽂기하면 단박에 눈에 띄는 책 상단의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노란 네모마크들이 여기저기에 보이더군요.
아련한 추억에 잠겨서 제 한국 판타지의 입문서였던 용의 신전을 꺼내들었습니다.(제가 본 첫 판타지 소설은 반지전쟁이었습니다만 그 책은 이상하게 '판타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더군요. 유명한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본 느낌이랄까.)
그 상태로 전 7권을 4시간이 넘도록 독파했습니다. 첫 1~2권은 서가 사이에 서서 읽었고, 3~5권은 뒤쪽 서가에 책이 꽂혀 있지 않은 빈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서 읽었으며, 나머지는 그때까지도 미처 미련을 놓지 못했던 '잠깐만 읽다가 다시 할일 해야지.'라는 생각을 버리고 책상 있는데로 나와서 의자에 앉아서 읽었습니다.
뻣뻣해진 목과 어깨를 두드리며(하늘 쳐다보기가 힘들더군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피아에 접속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서글퍼졌습니다.
PC통신시절에 올라오던 여러 소설들은 당시에 담론에 매몰되어가던 한국 소설들이 너무나도 무거웠던 제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남북이니 이념이니 일제니 하는 내용을 떠나서, 사회의 문제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떠나서, 신비하고 또 어쩌면 아련한 환상 속의 이야기들이나, 주변에도 있음직한 소소한 이야기들은 저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설들이 한국 소설의 지평을 넓혀갈 거라는 평론가들의 말을 들을 때면 제 이야기를 하는 것마냥 설렜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가벼운 소설의 역할은 대부분이 외국 번역소설들이 하고 있더군요. 인생의 깊은 성찰까지는 담아냈다곤 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잠깐 웃을 수 있고 어느 정도 잠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가볍게 읽어도 살짝은 무겁게 남는 소설들이요.
요청합니다. 제가 아직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소설을 요청합니다.
1. 세계관은 작가의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세계관 설정에 있어서, 적어도 작가가 공을 들였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을 원합니다. 평범한 D&D룰이나, 톨킨 월드 혹은 미즈노 료 이후 정형화된 일본식 판타지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져다 써야만 했던 작가가 이해될 수 있는 소설을 원합니다.
2. 소설 속의 인물들이 실제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소설을 부탁드립니다. 세계관에다 '인간들은 뇌가 없습니다'하고 설정한 것도 아닌데 '기본적인 사람의 행동 패턴대로 행동하는 것'을 찾기가 왜 이리 힘든 것일까요. 적어도 소설 내의 인물들이 각자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소설을 부탁드립니다. 세상 인간사에서 사건이란 백인백색의 사람들이 얽혀서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3. 그래도 어느 정도 문체가 확립된 작가분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장의 미숙은 그 내용을 떠나서 읽는 이를 괴롭게 합니다.
4. 분량도 많으면 금상첨화
문피아 굇수분들의 도움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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