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적이긴 하지만 첫 반응은 언제나 “새삼스럽게...“죠.
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좋게 말해서 장르문학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킬링타임용이고, 지금 제 경우 선작 40개 정도 중에 글을 클릭하기 전에 전편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는 작품은 솔직히 10개가 채 안됩니다. 반쯤 읽기까지 이게 A라는 소설인지, B라는 소설인지 기억이 안나는 경우도 허다하고, 읽다가 “어라?” 싶어서 제목을 확인하고 나서야 B라는 소설이었는데 A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무협은 한동안 이게 더 심했던 것이 이름들도 다 비슷비슷한데다 (남궁 어쩌고, 독고 어저고...) 설정 자체도 공통된 경우가 많아서 팬픽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던 경우도 많고요. 팬픽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수의 작품이 같은 언어로 쓰이기 때문에 (엘프, 오크, 검강, 검기, 스탯, 퀘스트...) 판무도 스포츠물처럼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규칙, 비슷한 팀들, 등등.
물론 그 와중에도 항상 새로움은 존재하고, 새로움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판무 특성상 작가의 판타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남의 일기를 읽는 듯한 재미도 있어서 계속 읽게 되기는 합니다. 평소 억눌렸던 갑질의 욕구, 육체적 힘에 대한 동경, 남들보다 그래도 조금 잘하는 부분에 대한 자랑, 나이가 많은 작가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왕년에 대한 추억 등...
그래서 보통 이 장르문학은 팬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고요. 특정한 얘기가 하고 싶다기보다는 해당 상황에서 나였으면 이랬을 것이다...라고 줄기를 잡고 시작하는 글이 많기 때문에 그 ‘상황'에 대한 영감을 준 작품으로부터 심각하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경우가 잦습니다. 일종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고, 처녀작에서 특히 많이 보이지만 글 자체를 그런 식으로 쓰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들도 있죠. 장르문학 자체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읽다 보니 ’여기서 나라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까요. 이런 분들의 글은 소재는 비슷한데 줄거리가 차별화되는 경우고...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의 독자는 장르문학을 읽으면서 설정놀이를 하게 됩니다. 남들이 해보지 않은 설정, 혹은 여러 설정의 기묘한 조합, 최근에 봤던 비장르문학의 설정을 가미한 것 (이래서 게임 얘기가 많이 나오는 듯...) 등.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소재는 참신한데 1~2권 지나면 필력이 떨어져서 줄거리가... 좋게 말하면 밋밋해지고 나쁘게 말하면 어디서 많이 봤던 얘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게다가 이런 유형은 독자들의 리플 영향도 많이 받아서 이상형의 히로인을 넣었다가도 발암이라고 하면 고민하고, 하고 싶었던 얘기를 어떻게든 끼워넣었더니 전개 늘어진다고 해서 상처받고, 현실적으로 좀 고민을 하면 호구라고 조롱당하거나 사이다스럽지 않다고 해서 또 시무룩... 그러다 보니 의지가 약하면 양산형 판무를 만들어 버리고 독자나 작가나 둘다 아쉬워하죠.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둘 다 표절에 속합니다. 법적으로는 특정 선을 넘지 않아 용인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이 되고요. 다만 장르문학의 특성과 고무림의, 약간 작가의 습작을 위한 특성 등을 감안해서 작가분들이 머리말이나 작품 소개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언급하고 링크를 걸어 놓는 정도의 예의는 갖추기만 하면, 복붙이 아닌 이상 용인은 될 수준이라 생각을 하고요.
살짝 다른 얘기를 하자면, 현대 미술의 경우 문외한들은 낯설어하지만 평론가들이 별 시덥잖아 보이는 작품을 칭찬하는 경우의 상당 부분은 해당 작품이 그 이전까지의 흐름에 대한 대답이거나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캔버스에 단순히 페인트를 뿌리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 그 이전까지의 시도와 작품들의 큰 맥락 안에서 보면 의미가 있는 일탈이거나 발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얘기죠.
장르문학도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평론가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쓰는 작가들이 그런 맥락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죠. 장르문학의 태생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표절시비에 휘말리는 대신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아 쓰게 되었다고 하면 그 모태가 된 작품은 원조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 밑으로 누가 어떤 식으로 발전시켰는지도 드러나면 표절을 논할 시간에 해당 작품이 특정'류'의 장르문학에 보탬이 되었는지, 아니면 답습을 하는 수준인지를 논할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일반 독자에게는 큰 반향이 없던 작품이 의외로 작가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등 소소한 재미가 생기겠죠.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장르문학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이 되는 것도 여러가지로 재밌겠고요.
표절 논란에 장르문학만의 특성을 어느 정도 감안하려는 생각에 글을 썼는데 쉽지는 않네요. 문피아 차원이던, 독자들의 강요던, 작가들의 양심이던...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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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50 백린(白麟)
- 16.05.06 00:38
-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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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霧梟
- 16.05.06 00:44
- N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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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Lv.50 백린(白麟)
- 16.05.06 00:44
- N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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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8 티모대위
- 16.05.06 00:58
- No. 4
지금 이슈화가 되는 건 장르의 유사성 때문이 아닙니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같은 장르의 경쟁작품을 음료수에 빨대 꼽듯 실시간으로 소재를 배껴서 쓰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당장 공모전만 봐도 A작가가 abc라는 소재 쓰면 빠를 경우 다음날, 늦을 경우 다음 주에 B작가가 그 소재를 차용해서 비슷하게 씁니다.
이게 한번이면 글쓴이의 말이 합당하겠지만 반복시행된다고 생각해보세요.
A작가가 최근에 잘 나오지 않아서 나름 신선한 소재나 설정을 꺼내서 트렌드에 맞게 잘 조합하는데 그걸 좀 더 필력이 좋거나 인기를 얻고 싶은 다른 작가가 지속적으로 배끼는 겁니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아무런 지적조차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두 작품을 모두 보는 경우에도요.
이것도 과연 팬픽이란 말로 넘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
답글
- 霧梟
- 16.05.06 01:13
- No.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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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8 티모대위
- 16.05.06 01:02
- N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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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70 innovati..
- 16.05.06 09:00
- No.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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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54 션의이야기
- 16.05.06 13:02
- No.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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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51 無의神
- 16.05.07 02:57
- No.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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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74 진소보
- 16.05.07 03:16
- No.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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