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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sf]<범할 권리>전장, 소녀

작성자
Personacon 통통배함장
작성
13.01.03 19:00
조회
3,294

<범할 권리>전장, 소녀

 

 

 

 

낯선 사람들이 능숙하지만 감정 없는 손놀림으로 내게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셋팅해 흰 가운을 입은 한 남자 앞에 도착했다. 말끔한 연구실에서 남자는 나를 보고 웃는다. 내 몸에 기계를 이리저리 훑더니 이내 손으로 만진다. 그때 갑자기 남자의 가슴팍에 쓰여 있던 글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제품 검사원 최두준』

 

제품……?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상대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 다시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름을 지어 줄게.”

 

남자는 내가 입은 티셔츠를 올려 배에 찍힌 도장을 확인하더니 입을 뗐다.

 

“S-HA055871…… 이름 짓기 힘든 코드네. 아, 그래! 섀넌(Shannon)이 좋겠다. 네 이름은 지금부터 섀넌이야.”
“체…… 넌……”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움직여 그가 내게 지어준 이름을 따라 했다. 남자는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따듯한 손으로 내 목 뒤에 연결된 케이블을 뽑았다. 손가락 길이만한 금속 침이 빠지는데도 별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내 몸에 전선이 연결된 패드를 붙였다.

 

“나는 네가 참 부럽다. 너를 구매한 고객의 정보를 보니까 엄청난 부자야…… 넌 아마 그 집에 가서 사람인 나보다도 더 좋은 생활을 하게 될 거야. 집창촌으로 팔려나가는 애들만 보다가 너 같은 애를 보니까 내가 참 뿌듯하다.”

 

남자는 내 팔을 이리로 움직여도 보고, 저리로 움직여 보더니 내게 눈을 깜빡여보라고 요구했다. 불과 몇 분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눈꺼풀을 움직여 보였다. 남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이번에는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손을 쥐었다. 조금 미동하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그래프가 나오는 모니터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정상 제품이야. 그래, 가서 잘 봉사해.”


.

.

.

.

전쟁이라는 것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부잣집으로 향하리라는 남자의 말과는 달리, 그날 나는 핵 낙진이 날리는 전장으로 징발 당했다. 러시아가 발사한 클러스터 핵 미사일은 미국인의 1/3을 증발시켰다. 국가 총력전의 양상에서 이제 더 이상 싸울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징발당한 이유였다.

 

케미노이드(Cheminoid)라는 명칭은 화학적 인조인간(Chemical Humanoid)의 합성어이자, 그것을 생산하는 기업 유나이티드 로보틱스(United Robotics)의 독점 상품명이었다. 케미노이드는 유전자 합성을 통해 인간과 거의 비슷한 조직을 갖춘 인조 생명체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전투용으로 쓰기에는 사람과 다를 바가 별로 없는 아주 값비싼 단백질 덩어리…… 때문에 섹스봇(Sex bot)이 주력 수출 상품이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것도 아주 돈이 많은 부잣집에 팔려갈 운명이었던……

 

러시아가 핵융합 기술을 개발하고 미국의 석유 기업이 도산 위기에 몰리자 미국은 러시아에 무력 도발을 감행했고, 전쟁은 발발했다.

 

나는 최초의 전투 케미노이드로 전선으로 향했다. 받은 훈련이라고는, 케이블로 주입된 기초 군사 훈련 지식이 전부였다.

 

아직도 전선에 도착한 첫날 우리를 바라보는 인간 병사들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속되는 핵 겨울에 춥고 굶주리고 배고픈 그들의 몰골은 우리를 먹잇감처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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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 사흘째.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케미노이드들은 최전방에서 밀려드는 부상자와 시체 행렬을 처리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부상자는 끊임 없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항생제를 비롯한 의약품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우리들이 치료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비록 의료적 지식은 의무병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부족했지만 그들은 심지어 죽어가는 순간에도 우리의 손을 한번 더 잡아보기 위해 애를 썼다. 특이하게도 어떤 병상에는 여군이 많았는데, 그들은 우리를 안쓰러운 눈빛으로만 바라볼 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여군이 내게 해준 말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 여군은 얼굴과 다리 일부분을 제외한 전신 2도 화상으로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중증 환자였다.


“내 위로 F-22가 떨어지더군…… 미친…… 이쪽으로 날아온다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어…… 참호를 너무 깊게 파놨거든. 처음에 팔 때는 포격을 피하려고 야전 교범에 써있는 깊이보다 더 깊게 팠는데, 아 씨발 운이 없으니까 이런 데서 인생이 조지는군. 어이! 로봇 아가씨. 지옥에 온 걸 환영해. 남자들이 짓궂게 하면 이 언니한테 말 하라고.”


그 여군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몇 개 사용했지만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내용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여군은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붙잡고 그 얘기를 하곤 했는데, 의료진의 얘기를 들어보니 머리가 돌았다고 한다. 머리가 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얘기하는 것을 지칭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나를 로봇 아가씨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는데, 아마 내가 이름이 없을 거라 판단해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여군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군은 내 다음 근무번이 왔을 때 이미 시체 처리실로 들어간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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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지않아 적의 선발대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관측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장전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몇 분 후, 조명탄이 쏘아지고 후방 포병대에서 발사한 포격이 날아들었다. 산등성이를 내려오고 있던 러시아 보병 부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군의 지원 사격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늘에는 러시아 공군의 전폭기가 포대 쪽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적이 유효 사격 거리에 가까워졌다는 관측반의 신호가 떨어지자 중기관총 사수가 총에 달린 서치라이트를 하나 둘씩 밝혔다. 정규군에 비해서는 훈련 기간이 터무니 없이 짧았지만 케미노이드 특유의 높은 학습 능력으로 인해 모두의 행동은 질서정연했다. 나는 배운 대로 왼쪽 눈을 감고 가늠쇠에 시선을 올렸다. 저 멀리 적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발사!”

명령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대전차 로켓 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보병 부대의 장갑차를 향해 로켓 무기는 꽂혔고, 크고 작은 폭발을 유발했다. 이어 중기관총의 불꽃이 깜깜한 저녁을 밝혔다. 나도 방아쇠를 당겼다. 점사로 놓고 발사하는 탄환은 나도 모르게 적의 보병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적 보병이 쓰러지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었다. 왠지 모르게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적의 응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가장 먼저 놈들의 장갑차에서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내 옆에서 중기관총을 잡고 있던 케미노이드의 몸에 정확히 꽂힌 기관포 탄환은 폭발하며 그녀의 몸을 찢어 놓았다. 나는 바로 내 옆에 있던 케미노이드를 파괴한 탄환의 위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분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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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섀넌(S-HA055871).

인간의 성적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케미노이드(Chemical Humanoid)죠.

그런데 전쟁에 징발되어 사람을 죽였고, 그 결과 동료들이 적에게 붙잡혀 능욕당하는 것도 보았어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우리는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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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색다른 홍보를 계획해보려고 했지만, 이 작품에 대한 제 아이디어는 이미 고갈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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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번호 S-HA055871의 생체 안드로이드.
섀넌의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http://blog.munpia.com/catrin01/novel/4741

 

박쥐의사님의 추천입니다.

 

http://square.munpia.com/boTalk/beSrl/59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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