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서효원
작품명 : 혈탑
출판사 : 서울창작
책 전반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편의상 평어로 쓰겠습니다.
문피아에 올라온 감상글 중에서 '서효원'이라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문피아에서 처음 그 존재를 알았고 기네스북에 올라갈(올라있는지는 모르겠음) 정도의 많은 작품을 짧은 생애동안 쓴 대표적인 무협작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20세기에 쓰여졌기에 구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90년대에 쓰여진 한국무협이라는 것은 오히려 요즘에 나오는 무협소설만 보아온 나에게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주었기에 평소에 찾게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독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서효원 님의'혈탑'이라는 소설을 보게 되었다.
전대의 악연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혈맥이 손상되어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천하제일기재 상관안. 그는 매우 잘생겼고 진정한 천재이다. 훌륭한 아버지를 본받아 의지 또한 굳세고 인품도 나무랄데가 없는 장부이다.
그러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악연으로 인해 홀로 남겨지게 되고 신비인의 휘하에서 무공을 익히는 천운을 맞이하게 된다. 신비인은 무림의 안위를 책임질 기재로서 주인공을 선택했고 주인공 또한 무공을 익히길 희망했기에 굳센 마음을 먹고 고행길에 오른다. 얼굴에는 추악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신분도 숨긴채.....
그 고행이란 것이 일단 말을 해서는 안된다. 궁금한 것이 있더라도 참아야 하고 신음소리조차 함부로 낼 수 없다.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차디찬 빙굴에서 하루 종일 내공 심법을 익혀야 한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식사는 벽곡단만으로 해야 하며 오직 혼자서 내공쌓기에 몰두한다. 단 초식의 운용이나 수련은 금지다.무려 3000일 동안........
3000일이란 시간을 계획하고 시작한 수련이 주인공이 초기재인 만큼 2400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약 7년. 10세부터 17세까지.그렇지만 일찍 수련을 마무리한 소득도 없이 특별한 술을 먹고 오래 잠들었다가 3000일이 되는 날, 열탕에서 수련해 왔던 또 한명의 여인과 신혼 첫날밤을 보내며 완벽한 음양무상신공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신비인은 마녀였으며 3000일 동안 수련해 온 내공을 모조리 빼앗고 주인공을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주인공은 철저하게 속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시 회생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며 복수하고 전대의 악연을 정리한다.
초반의 내용에 대해서만 굳이 전부 나열한 이유는 이부분들이 나에게 주화입마를 떠올릴 정도의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무협들에서 이정도로 주인공이 처절하게 바보처럼 뒤통수를 맞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상상하면 할수록 정말 끔찍하게 느껴졌고 허탈하게 생각되었다.
나이 10세이면 어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신음소리도 못내는 벙어리 흉내를 내라고 하다니.......그것도 3000일 동안.
나이 10세에 빛도 안드는 독방에서(그것도 빙굴) 혼자 지내게 하다니.............. 3000일 동안
나이 10세밖에 안되는데 하루종일 앉아서 내공심법을 수련해야하고 맛있는 것도 못먹고 마음대로 뛰어 놀지도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재밌는 책도 볼 수 없게 하다니.......
주인공이 처한 상황(나이:10세,주변환경:빙굴독방)과 3000일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의 고행을 연결해서 상상을 하니 얼마나 끔찍한 수련인지 말도 못하게 두렵게 느껴졌다. 교도소에서도 독방징벌은 높은 수준의 징벌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린아이를 무려 3000일 동안 완전 사회적으로 말살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고련을 시키는 것이 상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여태까지 읽었던 작품들에서는 이렇게 강렬하게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짧은 무협소설 일독경험과 괜히 3000일이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10세라는 주인공의 나이가 마음에 걸려서 개인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이렇게 두려울 정도의 환경에서 무공을 수련했으면 이제 달콤한 열매를 따 먹어야 하는데 그동안의 고련을 홀랑 빼앗겨서 폐인이 되고 그 고련이 마녀에게 속아서 강호를 위태롭게 하는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주인공은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게다가 폐인이 되어 죽음의 위기를 겪고 결국 절벽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지고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이 모래 더미에 묻혀 깨어났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감정을 이입할수록 열받는 장면이었으며 읽는 동안 부동심이 흔들리고 주화입마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주인공이 무공이 남아 있어서 연공을 할 수 있었다면 두고두고 분한생각이 나서 아마 분명 주화입마에 들었을 것이다. 바로 뒤에 기연이 등장하면서 그 배신감이 희석되고 새로운 희망과 복수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이미 허탈할대로 허탈해져서 뒷이야기를 읽어볼 힘이나지 않았다.
물론 작가가 그 부분을 강조한 것도 아니고 처절하게 묘사한 것도 아니다. 글 전체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전체 3권의 책을 완독하고 나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부분이기에 앞으로도 '혈탑'을 떠올릴 때면 '3000일 묵언독방연공과 배신'의 이미지가 먼저 생각될 것 같다.
아무튼 완독을 하고 서효원 님의 작품에서는 기존에 읽어왔던 근래 출판되는 작품과는 다른 인상을 받았고 그 느낌이 색달라서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3권으로 마무리 지어졌기에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내용 전개가 시원스럽게 넘어가서 나와의 상성이 맞는 듯 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주인공이 엄청난 기연으로 강한 것이 분명한데 계속 속고 당하는 것 같아서 시원하지 않았고, 주인공 입장에서 분명 해피엔딩인 것 같은데 크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없었다. 좀 묘했다. 그게 그 작품의 특색인 것 같아서 요새의 경향이나 흐름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되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전의 완결된 작품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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