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담화증후군
작품명 : 폐허를 삼키는 새
출판사 : 문피아 연재중
흑백만이 존재하는 섬. 아이들은 이름 대신 등수로 불린다. 굳건한 자의식과 혼란으로 가득차 몽상적이며, 사변적이고, 퇴폐적이기까지 한 소설.
작가 스스로의 말처럼 설정을 조금씩 녹여내지 못해 아쉬운 소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영도 작가의 '새'시리즈의 영향도 곳곳에서 느껴진다.
매트릭스에서 빨간약과 파란약의 선택지가 진실과 허구의 갈림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인간과 탈각시의 선택이 존재한다.
욕망마저 프로그램된 사회에서 자신만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선 파괴자(혹은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
'루저'란 단어로 정리되는 대한민국의 억압적 현실을 자신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것으로 풀어내는 다른 장르 소설과는 달리, '폐허를 삼키고, 인간이길 포기'함으로써 아예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을 부정해버린다는 점에서 약먹은 인삼님의 SPECTATOR'처럼,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줄 것이라 기대되는 작품이다.
그러고 보면, 요사이 '중화반점'이나 아직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하얀 늑대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SPECTATOR'처럼 '신선한 설정'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관'을 담는 글들이 알게 모르게 늘어가는 것 같아 기쁘다.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목을 자르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거꾸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강해지기 이전에 스스로부터 변해야 한다.
아무리 강해지고 높이 올라가봐야, 그건 그저 다시 떨어지기 위해 올라가는 것일 뿐,
올라가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면, 나의 존재는 등수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름보다 등수로 불리는 것이 맞다. 결국 질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숫자로 불린다는 면에서 말이다.
작가는 캐릭터나 전개보다는 분위기 묘사에 더 집중하려는 것 같다. 이런 글쓰기는 작가의 개성, 혹은 전략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캐릭터나 전개에 힘이 빠지면, 몰입하기가 쉽지가 않다. 더구나 주인공이 여자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남자 독자가 대부분인 상황이니까). 하다못해 옷이라도 입혀줘라. 독특한 신체적 특징이나 버릇, 트라우마등을 복선이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NO2가 현없는 바이얼린을 들고 다닌다던지... 아니면 탈의 왼쪽 뺨부분을 도려낸다던지(바이얼린 연주를 위해)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