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황금인형은 개인적으로 나와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월드컵의 들썩임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02년 9월, 고무림 탄생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금인형의 연재와 더불어 이벤트가 발표되었고, 나는 1타로 이벤트에 응모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는 이벤트 대상이었다. 아마도 이런 결과는 이벤트 첫 응모자라는 프리미엄에 무엇보다 지금은 없어진 무협사이트 무림향의 장경님 홈페이지에서의 활발한 활동과 아부성 짙은 발언을 일삼아 온 나에게 장경님이 은근 슬쩍 넘어온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사은품으로 장경님의 사인이 수록된 성라대연 전질을 받았으니 나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 누구보다도 황금인형에 열정과 관심을 쏟아왔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황금인형이 그 화려한 결말을 맺고 있다.
황금인형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분분하지만,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하나는 이전 천산검로, 암왕, 빙하탄 등으로 대변되는 장경 특유의 무겁고, 어두운 작품들에 비해 특유의 강렬함이 덜한 것 같아 아쉽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록 강렬함은 덜하지만 과거에 비해 보다 밝고, 가벼우며 경쾌한,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활극은 해학적 소설의 백미를 보는 것 같다 라는 것이다.
전자의 반응은 장경의 매니아들로 어느 정도 연령대가 형성된, 과거부터 장경의 글을 읽어오고 또 커다란 향수를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조금 더 한 것 같고, 후자는 다소 연령대가 내려간 어린 친구들, 혹은 성라대연으로 장경을 처음 접한 이들의 반응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나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나는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도 똑같이 좋아한다. 그러나 굳이 어느 한쪽을 꼭 선택해야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지 싶다.
좀더 솔직해 지자면, 나는 '황금인형이 가볍다' 라는 의견에 결코 동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분명 암왕, 빙하탄 등에 비하면 밝고, 가볍고, 경쾌한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황금인형이 밝히는 이야기나 주제는 과거 작품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즉, '가볍게 읽히되,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라는 것이다.
언뜻 이해가 쉽지 않으리라. 해서 간단한 비교를 해보겠다.
먼저 천산검로를 살펴보자.
천산검로의 등장인물들은(늑유온을 비롯한 공동일문의 제자들, 장용, 노신, 북문호 등 속가제자들, 곽운경 등의 화산파 제자들 그리고 서천래마백 등) 모두가 혈연의 기억과 사문의 혈채가 남아있는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이들이다.
당연히 삶의 무게만큼 그들의 행보도 가볍지 않고 이야기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황금인형의 등장인물들(현헌, 장자영, 하후은 등 마교의 후예들, 집정대사도, 대흑저, 연왕 등 일부 제외), 성인학, 해원, 산-수돌이, 엄등, 위대용 등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꾸밈없는 삶의 건강성을 일깨우는 인물들이다. 즉 희극적 상황의 설정과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활극은 그만큼 글의 무게를 가볍게 해준다. 그러나 이면에 감추어진 황금인형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연왕부, 응천부, 마교의 암투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어쩔 수 없이 암투 속에 놓이는 인물들 또한 가볍지 않은 행보를 이어간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이전의 무겁게 읽히는 무거운 글보다는 가볍게 읽히되 결코 가벼운 글이 아닌 지금의 황금인형이 무협 장르의 속성상 더 적당하지 않을까?
장경의 글은 정통무협에 가장 근접해 있다. 특히 황금인형은 더욱 그러하다.
신무협의 발호와 더불어 등단했지만 그에게서는 정통무협의 향기가 짙게 우러난다.
물론 우리로 하여금 정통무협을 식상케 했던 기연, 우연으로 점철된 박스무협이 아닌, 전통의 명문 구파일방, 정과사의 모호한 경계, 칼 한 자루로 강호를 종횡하며 진정한 무도의 동반을 걷는 무인들. (나는 김용의 소오강호(笑傲江湖)를 무협의 전형 또는 교과서로 생각한다.)
바로 그 복고 무협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판타지 무협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현 무협시장에서 황금인형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나고 가치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황금인형은 성라대연의 뒤를 잇는 연작 소설의 형태이다.
물론 성라대연 과는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 구조이므로 따로 떼어놓아도 글을 읽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라대연을 읽은 독자들에게 황금인형이 더욱 재미있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중국무협에서는 자주 볼 수 있고, 국내에도 드물게 있는 것으로 안다.
국내 무협에서도 이런 연작 형태의 소설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싶다.
또 황금인형은 국내무협에서 드문 역사 무협소설이다.
'황제인 조카와 숙부인 연왕의 대혈전' 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야사에 곧잘 등장하는 연왕의 친모, 공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연왕부, 응천부, 구파일방, 마교 그리고 고려의 검호들. 이들이 벌이는 황금인형을 둘러싼 이전투구!
황금인형이 풀어 가는 이야기는 중국 역사무협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완성도 역시 그 못잖은 작품이다.
요즘의 무협소설은 대개가 10권에 육박하는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장편소설이라 부르기에는 모자란 감이 없지 않다.
장편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복합적-입체적 구성이 아니라 단순-평면적 구성의 글들(10권에 가까운 글들 치고 지나치게 단순한 사건의 나열식 전개)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생각)이 필요한 글들이 아닌, 주인공의 행보를 따라가 (보는)데 그치는 글들이다.
(보는)글은 쉽게 읽히는 대신 그 특성상 재미만을 좇기 쉽다. 그러나 (생각)이 필요한 글들은 읽기에는 약간의 여유가 필요할지 모르나 그 이상의 재미와 더불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의미, 세상의 구조, 사상과 가치관을 돌아보게 한다.
좌백이 쓰고 싶은 글로 비적유성탄을, 읽고 싶은 글로 천마군림을 언급했는데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황금인형은 복잡한 구성, 입체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편소설이며 (생각)을 요하는 글이다. 어느 정도 무협을 접한 독자들에게는 쉽게 읽히는 글이겠지만 무협을 많이 접하지 못한 이들, 또는 나이 어린 독자들에게는 쉽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름지기 이런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독서의 수준을 높일뿐더러 무협소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금인형은 한국 무협의 현 수준, 정점을 나타내는 지표와 같은 글이다. 한국무협의 현 수준이 어떠한지 직접 체험해 보길 바란다.
황금인형을 읽은 독자들이 많이 지적하는 또 다른 하나는 '성인학'의 우유부단한 성격묘사이다. 성라대연에서도 주인공의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 혹은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성격이라 몰입도가 떨어진다 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이 글 황금인형도 사실 주인공 성인학 보다는 사매 해원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남녀간의 역할 전도로 해원의 활달한 성격과 성인학의 우직한 성격의 대조를 통해 해원은 말괄량이로, 성인학은 우직한 남자로 묘사하려는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이러한 설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상당수 있다.
(생각)보다는 (보는) 글에 익숙해 있고, 적극적이고 강한 무협 주인공을 선호하는 입맛, 무협주인공은 남자여야 한다 라는 뿌리깊은 관념이 그 이유가 되지 않을까?
솔직히 나부터가 그 이유에 여전히 연연해 있다.
언젠가 설봉을 한국무협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칭한 적이 있다.
사신을 거쳐 대형 설서린에 이르러 그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일찍이 한국 무협사에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 냈고 그만의 아성을 구축하게 되었다.
장경 역시 성라대연, 황금인형에 이르러 그만의 문체를 완성했다.
투박하지만 조사를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등의 간결한 어휘나 문체는 그의 글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하는 개성적인 문투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예전에 장경님으로부터 본래 6권 예정이던 황금인형을 글의 내용상 한두 권쯤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라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결국 자칫 글이 늘어질까 우려한 장경님이 예정대로 6권으로 마무리지은 것 같다.
솔직히 2권만이 아니라 네댓 권 늘어나길 진심으로 바랬다.
이 글은 20권이 된다고 해서 늘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6권 완결은 요즘의 추세로 보자면 짧은 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황금인형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결말을 이끌어 냈다.
물론 장경님이 후기에서 밝힌 대로 장자영, 현헌, 집정대사도 등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여백의 미, 여운의 미가 아닐까?
성인학과 그의 사제들의 새로운 강호행도 기대되고, 해원과 장자영, 양다리 걸친 우직한 성인학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하는지도 보고싶다. 소국충의 꾀임에 빠진 엄등은 색마가 되지 않을까?
새로운 무림맹주 이장무의 활약상도 더 지켜보고 싶다.
묵검 하후은이 종사로서 커 가는 모습도 보고싶다.
여운이 길수록 글에 대한 기억도 오래 남는 법이다.
좋은 글로 시작하는 작가들은 많이 있지만 좋은 글로 마무리짓는 작가는 많지 않다.
중간에 작가 개인의 욕심이나 출판사의 요청, 혹은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다 보면 글이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리라.
장경의 황금인형, 임준욱의 괴선, 송진용의 풍운제일보는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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