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상과 비평란의 공방에 대한 짧은 생각.
누군가 저에게 '무협소설중에 네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뭐냐?' 라고 묻는다
면, 저는 망설임 없이 '풍종호의 '화정냉월'이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화정냉월'의 무엇이 그렇게도 훌륭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망설
임 없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좌백의 '혈기린외전'보다 '화정냉월'이 더 훌륭하다는 말이냐?' 라고 묻는
다면, 그건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백의 '혈기린외전'은 임의로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 자리에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
을 대체하든 질문의 요지와, 그에 대한 제 반응은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제가 읽거나 평할
가치가 없다고 매도해버리는 작품이라도 그러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무협소설은 장경의 '천산검로'이다' 라고 하셔도,
저는 이의를 갖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는 '화정냉월'만큼 형편없는 무협소설은 본 적이 없
다' 라고 하셔도,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지요.
누구나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인식되는지에 대한 문제는 오로
지 그 사람 스스로만의 고유한 권리이자 책임일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저는 구운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먹으면 속이 거북하기 일쑤이고, 거기에 술까지 곁들여 마신다면 거의 반드시 탈이 나지
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과 4년쯤 전까지만 해도 저는 고기를 무척
이나 잘 먹고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한 때 일하던 직장의 구내식당에서 매주 한 번씩 삽
겹살을 내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저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가장 많이 먹는 녀석
으로 통하기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구운 고기는 물론이고 삶은 고기조차 매우 드물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경우에나 아주 약간 먹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저를 한심하게 쳐다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저를 고려해서 횟집에 갔다가, 회는 더더욱이 먹지 못한다는 소릴 듣고
는 결국 짜증을 부립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가 얼마나 몸이 이로운지,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를 저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저는 난감할 따름입니다.
어째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터에, 그 어떤 사람들에
게 제 식성을 납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고기에 대한 의견을 저 역시 한 때 동감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지도 못합니다. 어깨나 으쓱일 밖에요.
그러나 언젠가, 일 관계로 만난 어떤 사람이 '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싫다' 라는 투
의 말을 했을 때, 저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도 싫다' 라고 대
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채식주의자인 어떤 사람이 '난 고기를 먹는 사람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을 때에도 '난 고기를 먹는 사람을 야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야만적이라고 생각
한다' 라고 대답합니다.
아무튼 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제가 근간에 벌어졌던 공방을 보면서 하던 생각이 바로 그러합니다.
혹여 '그래 너 잘 났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게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가치를 들어 제 생각과 행동이 옳다는 것을 납득시킬 자신도 없습니다. 그게 옳다
고 여기는 것마저도 제 나름의 주관일 뿐이니까 말이지요.
2. 감상과 비평의 본질에 대한 짧은 생각.
감상과 비평의 수단적 의미에 대해서는 굳이 거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의 지식과 절대의 중용으로 관조하며 판단할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모든 종류의 감
상과 비평은 '그건 네 생각이고' 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도와
내용이건 하나의 작품에 대한 평은 결국 '개인적 감상'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목적을 '독자의 시야 확장'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독자들은 각각의 시선으로 읽습니다.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고, 초점이 다르며, 어떤 것은 분명히 보고, 어떤 것은 보지 못합니
다. 혹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습니다.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은 고
개를 끄덕이고, 수긍할 수 없는 문장에는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그것은 작가조차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머리속에서 구상되어 자신의 손을 통해 구체화된 이야기와 사념이지만, 그
모든 방향의 형태와 의미를 한 눈에 바라보지 못합니다. 저긴 왜 저렇게 썼을까? 의아해 하
면서도, 막상 고치려들면 어떻게 고쳐야할지를 모릅니다. 작품 속에서는 '갑'이 옳다고 썼으
면서도, 정작의 실생활에서는 '을'이 옳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이란 마치 보는 사람의 시선마다에 서로 다른 형태로 변해버리는 요물과 같다
하겠습니다.
평론이란 그렇게 다채로우면서도 상이한 독자들의 시선을 좀 더 밝게 비추어주며, 시야를
넓혀주는 작업이 아닐까요? 서로의 시야를 교합하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누군가 작품을 읽고 말합니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이런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모양으로 보이더군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또 다른 독자가 대답합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런 모양으로는 보이지 않던데요?
저는 그런 방향에서 그런 시선으로 보았더니 그런 모양이더군요.
님이 말씀하신 방향과 시선으로 보아도 여전히 그런 모양으로밖에는 안보이더군요.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는 독자도 있겠지요.
아, 정말 그렇게도 보이네요.
저는 이렇게 보아서 이런 모양인줄만 알았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누군가 또 말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런 모양도, 이런 모양도 아니던데. 저런 모양이더라구요.
물론 모든 독자의 시야가 똑같은 폭과 깊이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내 눈에는
분명히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남이 못 본 것을 보았다고 우쭐할 것도, 남이
본 것을 보지 못한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
게 보느냐의 문제이고, 그렇게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에 자신의 시야가 넓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평론은 작가를 위해서가 아닌, 독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작가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목적을 위해서 쓴 평론이라면 그것은 이미 평론이 아닙니다.
평론이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자신이 쓰려고 했던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독자
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도록 해 주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마저도 평론의 과정
에서 파생되는 부가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론의 목적이자 지향점은 한 편의 작품에서 얻
을 수 있는 독자의 정신적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해, 독자들 스스로가 서로의 시야를 넓혀주
는 것입니다.
이따금 독자의 평이 작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단점을 짚어주어 고치도록 하고, 장점을 돋우며, 나태하거나 성급해지기도 하는 작가의 호
흡을 골라줄 수도 있다고.
뜻은 좋고 그게 가능하다면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타나 버그등의 지적은 제외합니다만)
작가는 오로지 그 혼자서만 작품을 씁니다.
주변의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작가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닌 내 작품
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저 인물은 저 장면에서 죽어야 할 것 같은데..?' 라고 해도, 이미
작가가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죽이고야 맙니다. 아니,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그
것은 '내 작품'이니까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등장인물과 성격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아'라고 한다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작가 스스로가 그 의견에 수긍한다면, 작가는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쓰지, 이
미 설정한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고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독자의 평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그려낸 모양이 다른 사람들에
게는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의문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썼는데, 정말 독자들은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고 읽었을까? 혹시 회색 하늘이 아름답다고 생
각하던 사람이 있다면,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고 하는 내 말에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정말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제대로 쓴 것일까?
가장 좋은 평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솔직한 답변일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봤어요, 저렇게 봤어요 하는.
심지어 나는 검은 하늘이 아름답다는 글로 봤는걸요? 라는 대답마저도 작가에게는 좋은
답변이 됩니다.
그러나, 그 답변들 중 어느 것도 다음 작품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왜 저렇게 보았을까, 하는 의문은 가지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보는 독자들을 위해 자신
의 작품을 고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설령 영향을 받는다해도 그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
을뿐더러, 만약 독자들의 반응이 저러니까 앞으로는 저렇게 써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순간부터 작가가 아니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창작이 아니라 '대필'이니까요.
독자의 평은 한 인간으로서의 그에게나 기쁨을 줄 뿐, 작가로서의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
을 주지 못 하고,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래야 할 것입니다.
도움이 되는 대상은 오로지 독자 자신들입니다.
내가 향유했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향유하고 싶어하는 고운 마음이 작품에 대
한 평을 쓰게 만들고, 그러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나와 같은 즐거움을 만나고, 동시에 나는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즐거움을 새로이 깨달아갑니다. 아주 가끔씩은 '이건 정말 악취나
는 쓰레기다!' 라는 작품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취나는 쓰레기'라는 평을 한다 해도, 그
것은 혹여 다른 사람들이 무심결에 그 작품을 읽고 나와 같은 곤혹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고운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어떤 독자가 무슨 말을 해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방식
대로 쓰고, 독자는 그것을 읽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호평이나 혹평에 대해서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론은 오로지 독자들만을 위한 글인 것입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가 아니라면, 평론은 쓸 이유도, 읽을 가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모든 평론은 '독자인 자신을 위해서' 쓰여지고 읽혀지는 게 옳을 것입
니다.
'나'을 위해서 수고롭게 쓴 다른 독자의 글. 고맙지 않을까요?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