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뒤지면 끝도 없으니 조선시대에서 몇 개만 추리겠습니다.
1.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했다
몇몇 역사학자들이나 소설가들은 조광조를 상당히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조광조는 사림의, 사림을 위한, 사림에 의한 정치를 위하는 인물이었고, 그가 내놓은 개혁안들 역시 훈구파에 대한 공격적인 의도로 가득했습니다.
실무능력도 좌절 수준인데다, 사림파는 군자, 훈구파는 소인배라는 매우 흑백적이며 쪼다스런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말빨도 좋아서 국왕도 바르려고 하다가, 결국 사약을 드십니다.
능력치로 치면 조선 초기 정도전이나 후기의 정약용에 비교도 안 될 수준이지만, 일단 그가 주장한 성리학적 질서 체계가 조선 후기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사림파가 이후 정권을 잡은 것을 생각하면 절대 개혁에 실패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냥 본인이 권력을 누리지 못했을 뿐.
2.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
율곡 선생이 하라하라 그랬는데, 안하다 개작살났다...라고들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축성을 하고 주요 인재들을 배치하는 등, 상당한 준비를 했습니다. 치트의 대명사인 이순신 장군만 해도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기 전에 말도 안되는 승진을 했습니다. 심지어 임관지로 가고 있는 도중에 발령이 취소되어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습니다.(그만큼 다급했죠.)
문제는 이러한 전쟁 대비가 ‘왜구’를 방비하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왜군'이 아니라 말입니다.
조총과 장창, 일본도로 무장한 왜군은 당대 유럽군과 거의 흡사한 교범을 갖추고 있었고, 전국시대로 전쟁수행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오랜 평화기를 거치다 벼락치기를 한 조선이 감당할 수 없었죠. 더구나 조선 초기에 조선군의 근간을 이룬 기병과 팽배수 체제의 교범은 이 시대에 맞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진관체제의 붕괴로 도입된 제승방략 체제의 병력 확보도 제대로 안 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차출되지 못한 예비군은 근왕병이니 의병이니 하면서 전선에 등장했고, 이후 관군에 편입됩니다. 그 뒤로 조선군과 왜군의 전력은 비등해지게 되었죠.
3. 명성왕후
매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 한 여걸 혹은 성녀...로 취급한다지만.
그런거 없습니다.
원래 명성왕후, 민자영의 여흥 민씨 집안은 안동 김씨에 비해 권력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족보로 따지면 고종에게 이모나 다름없는 민자영을 며느리로 들였습니다.(원래 안동 김씨 가문과 혼사를 파기하고요.)
그러나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삽질을 하는 와중에서도 어느 정도 회복시켜놓은 조선의 재정을 파탄일보직전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특히 국방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무개념했습니다.
당대에 사치스럽기로 악명이 높았던 청나라 서태후도 군부의 돈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이 아줌씨는 그런 개념도 없었지요. 아들 장수 기원한다고 무당에게도 퍽퍽 뿌리고, 여흥 민씨 가문도 이 기회에 한몫 챙기자며 설쳐댔지요.
이러니 구식 무기로도 전멸을 각오하고 서양군대와 싸웠던 조선군이, 민자영 집권 때는 200톤짜리 소형 증기선 타고온 50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줄행랑을 칩니다. 그리고 맺어진 것이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그 후로도 변하지 않아서 군인들 봉급 때먹다 터진 사건이 임오군란이지요. 이거 무마하자고 청나라에서 군대 빌린 덕분에 당시 조선은 청나라 속국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이전에는 책봉을 받긴 했어도 자주권이나 있었지만, 이땐 그렇지도 않았죠.
이 아줌마가 이미지 포장이 된 이유는 결국 일본군에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조선을 거덜 낸 원흉이나 다름없지만, 그거 하나로 현재의 이미지를 구축했지요.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