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아내 외에도 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첩이 있었고, 구한말에도 첩이 있었고, 일제시대에도 첩이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첩이 있었죠. 지금은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만 허용되기 때문에 첩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음으로 양으로 첩을 두는 집이 더러 있기는 할 것입니다.
처와 첩의 암투를 그린 중국소설들이 몇 개 있습니다. 문피아에 연재중인 작품으로는 [하위현처]와 [팔보장]이 있는 것 같네요. 나모라 작가님의 [왕래자]에는 서양의 첩이 조금 등장합니다. 중국식 처첩제도도, 서양식 처첩제도도 우리네 처첩제도와는 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홍길동이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대목을 고딩 때 국어시간에 읽어보셨을 겁니다. 첩의 자녀는 이렇게 적자적녀에 비해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처의 입장에서는 첩이 원수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첩의 입장에서는 본인과 자녀를 위해서라도 처를 이기려고 온갖 수단을 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죠. 질투와 투쟁은 온갖 소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처가 온화하고 첩이 자신의 신분을 넘는 언행을 하지 않는다면, 가화만사성이 가능하긴 한데, 인간의 성정이 그렇게 되기는 힘들죠.
시리즈에 연재 중인 [천산기]에는 사막여라는 여성이 나옵니다. 이 여주인공은 상서부에서 자랐는데, 나중에 오황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2년6개월이 넘도록 임신을 못하자 사막여는 자청해서 첩(측비)을 들이게 됩니다. 사막여는 측비를 홀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대우해 줍니다. 그리고 2개월만에 측비가 임신에 성공합니다. 사막여는 다시 자청해서 2명의 첩을 더 들입니다. 그리고 또 2개월만에 측비가 임신에 성공합니다. 다른 집안 같았으면 처와 첩이 서로 질투하고, 투쟁을 벌일 만도 한데, 사막여와 측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황자부는 가화만사성 평온합니다. 앞으로 서로 싸울 일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평온하네요.
왜 평온한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첫째 이유는 남편인 오황자가 사막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황자는 정비인 사막여에게 사랑을 주고, 측비에게서는 자녀를 얻으려고 합니다. 둘째는 측비가 된 여성들이 모두 인품이 괜찮은 여성들로 뽑았다는 것입니다. 오황자가 밖에서 눈이 맞아서 뽑은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측비들에 대한 질투(사랑을 얻기 위한 투쟁)가 없었다는 것이죠. 셋째로는 사막여가 ‘내 배로 낳은 자식만 편애하겠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첩이 낳은 자식도 어차피 적모인 사막여에게 효도를 해야 합니다. 넷째로는 사막여가 오황자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게 불효이고, 대를 잇는 게 효도이니, 사막여는 첩을 들이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몇 년 더 기다려 보자는 둥 하면서 미적대거나 꺼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일로 남에게 아픈 지적질을 받을 이유도 없고, 고부간에 갈등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오늘 이 부분을 읽다가 탄복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첩을 들이고도 가화만사성을 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탄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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