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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개관

작성자
Lv.17 紅淚
작성
04.08.15 19:32
조회
151

간단하게 요약한 중국역사입니다

일단은 알고 있는게 좋겠죠

그래야 어디 바꿀때 없나 찾아보는 것도....-_-;;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중국은 황하문명의 발상지로 5,0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4천년 전에 이미 고유문자를 만들고, 나침반, 화약, 인쇄술, 제지술은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중국인의 자랑거리이다. 은 왕조때 나라의 체제를 갖춘 후로 첫 통일국가인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이어오면서 한족을 중심으로 여러 주변 민족들과 어울려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여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서양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1912년 손문이 이끄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 뒤에도 일본의 침략으로 중 .일전쟁이 일어나는 한편 공산당과 국민당의 30년간의 내전이 계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후 1949년 승리한 공산당이 대륙부를 차지하면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섬으로 밀려났다.

중국은 공산당을 주체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54년 헌법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왔으나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중국의 문호는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으며 또한 자본주의의 우수성이 유입됨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를 세분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왕조의 변천

중국 역사에는 옛날 삼황(三皇)·오제(五帝)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속하는 것이고 실증을 할 수는 없다. 오제 중에서 특히 《書經》이라는 역사책에 보면 요(堯)·순(舜)임금 두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보이고, 그 다음에 우(禹)임금이 임금자리를 이어 받아서 '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夏 다음에 나온 왕조가 '商'이다. 상나라는 중간에 '은(殷)'이란 곳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국호를 '殷'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 상나라때의 유물은 지금도 갑골문자 등에 나타난다.

은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주(周)'인데 800여년을 계속하는 동안 도읍을 한 번 옮기고, 또 중기 이후에 가서는 양상이 크게 바뀌어 가고 있다. 앞서 호경(鎬京)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서주(西周)' 뒤에 낙양(洛陽)에 도읍한 때를 '東周'라 하며, 동주에도 전기를 '春秋時代' 후기를 '戰國時代'라고 한다. 이 주나라를 멸한 것이 '秦'나라다. 위의 夏·殷·周를 합하여 '三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나라 다음에 나온 것이 漢나라인데 400여 년 계속되었으나 중간에 일시 망하여 왕망(王莽)의 '新'이란 나라가 서기도 하였다. 新 이전에 長安(지금의 西安)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西漢' 또는 '前漢', 新 이후에 낙양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東漢' 또는 '後漢'이라고 하는데, 또 합하여 '兩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한 말기에 가면 소설 《三國志》에 나오듯이 조조가 승상이 되어 사실상 임금 노릇을 하다가, 그의 아들 조비가 '漢'을 아예 없애고 '위(魏)'나라를 세우고, 거기에 대항하여 유비가 '촉(蜀:蜀漢)', 손권이 '吳'나라를 세운다. 이 세 나라를 통틀어 '三國'이라고 하며, 이 시대를 '三國時代'라고 한다.

그 다음에 '진(晉)'나라가 나타났지만, 2대에 북쪽 영토를 북쪽에서 침입하여 온 이민족들에게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나게 된다. 북쪽에서 낙양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西晉', 지금의 南京에다 도읍을 옮긴 이후를 '東晉'이라고 한다. 그 후 '수(隋)'나라가 들어설 때까지는 중국의 분단 상태가 계속되며 수많은 나라들이 부침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동진'을 이어 한족들이 네 나라를 계승하였는데, 宋·齊·梁·陳이다. 이 '宋'은 이 뒤에 가서 '唐'이후의 '宋'과 구분하기 위하여 '유씨가 세운 송나라'란 뜻으로 '劉宋'이라고도 한다. 이상 동진부터 '진'까지 남쪽에 있었던 나라들을 합하여 '南朝'라고 부른다.

당시 북쪽에서는 다섯 이민족들이 먼저 열 여섯 나라를 번갈아 세웠는데 이를 합하여 '五胡十六國'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北魏' - '西魏' - '南魏' - '北周' - '北齊' 같은 나라들이 북쪽에 있었다. 이 때를 '北朝'라고 부른다. 위의 남조와 북조를 합하여 '南北朝'라고도 부르며 위나라 때부터 이 시대까지 중국이 사실상 긴 분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통칭하여 '위·진 남북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이 위·진 남북조시대 가운데서 외래 민족이 차지하였던 북조를 제외하고서 양자강 이남에서 한족들만이 명맥을 잇고 있던 나라들 여섯―삼국시대의 '吳'와 그 다음의 '晉' 그 다음의 宋·齊·梁·陳―을 합하여 '육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위·진 남북조 시대를 이어 통일 왕조를 세운 것이 '隋'이며, 그것을 이어 295년 동안 국세를 크게 떨친 것이 '唐'나라다. 당나라와 宋나라 사이에 불과 70년이라는 짧은 시기였으나 '五代·十國'이라는 분단 시대가 있다. '5대'란 '後梁·後唐·後晉·後周' 등 '後'자가 들어가는 다섯 나라인데 황하 유역의 중원을 차지하고서 잠시나마 황제를 칭하였던 나라들이다. '十國'은 중원을 차지하지 못하고 중국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미처 '皇帝'니 '王'이니 하는 이름조차도 못 붙여 보았던 미미한 나라들이다. 이 중에는 '南唐'·'西蜀'같은 나라들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 '오대 십국'을 통일한 것이 宋나라다. 처음에 개봉(開封)에 도읍하였다가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에 쫓겨 항주(杭州)로 수도를 옮겼는데, 앞의 시대를 '北宋', 뒤의 시대를 '南宋'이라고 한다. 한편 그때 북쪽에서는 거란족이 세웠던 '요(遼)'나라, 여진족의 '金'나라, 몽골족의 '元'나라로 바뀌고 원은 드디어 '南宋'을 멸하게 된다.

'元'나라는 북경에 도읍하였으며, '明'나라는 처음에 '南京'에 도읍을 하였다가 北京으로 옮겼고, 만주족이 세운 '淸'나라는 역시 북경에 도읍하였다.

이상이 中華民國이 들어서기 이전까지의 중국 역사이다.

고대 역사의 기원

중국 문명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黃帝)는 황하 유역의 반대 세력들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였다. 黃帝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임금이 천자가 되어 어진 정사를 폈으며 효행으로 이름 놓은 순을 발탁하여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선양하였다. 이 요(堯)·순(舜)의 치세는 지금까지도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불리며 두 임금은 성군의 이상형으로 높이 추앙되고 있다.

순임금은 우(禹)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우의 아들 계(啓) 때에 이르러 세습 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夏)왕조가 이어진다. 17대 걸(桀)왕에 이르러 말희라는 절세 미녀에게 빠져 폭정을 폈기 때문에 은(殷)의 탕(湯)왕에게 멸망하였다.

은·주시대

은(殷=商)의 탕왕은 덕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명재상 이윤(伊尹)의 협력으로 은왕조를 세우고 왕도정치를 폈다. 19대 임금 반경(盤庚) 때에 이르러 도읍을 은허(殷墟)로 옮기고 쇠퇴해 가는 은왕조를 중흥시켰다. 30대 임금 주(紂)왕 신(辛)은 절세 미녀 달기에게 정신을 빼앗겨 주지육림의 놀이와 가혹한 형벌로 포악함이 극도에 이르자 주(周)의 무(武)왕이 목야의 싸움에서 은을 멸망시키고 주왕조를 세워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은 새로운 법도와 예악을 제정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선정을 폈다. 10대 임금 여왕 때에 이르러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 여왕은 도망치고 공화(共和)시대가 열린다. 12대 임금 유왕 때에 포사라는 미녀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봉화를 올리게 함으로써 마침내 유왕은 견융(犬戎)에게 살해되고, 13대 임금 평(平)왕은 견융족의 침입을 피하여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으로서 동주 시대가 열리게 된다.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제13대 평왕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를 東周時代라 하고 동주 시대를 다시 春秋時代와 戰國時代로 나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천자로서의 위력이 없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된다.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수가 마침내는 10여 개국으로 압축되었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이 오패는 제의 환공, 진(晋)의 문공, 초의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라는 설과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대신 송의 양공과 진(秦)의 목공이라는 설이 있다.

진(晋)의 문공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성복의 대전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초나라 성왕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천도에서 회맹하였다.

초의 장왕은 필의 전투에서 진(晋)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패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천하의 형세는 진(晋)과 조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秦)이 서로 견제하는 4강의 시대로 접어든다. B.C 546년 송나라 수도서 미병회담이 열려 일종의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중원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이 때 장강 남쪽에서 오나라·월나라가 일어났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 손무 등의 계책을 써 중원의 초나라, 진(晋)나라, 제(齊)나라를 위압하고 월(越)나라를 제압하였다. 월왕 구천도 범려의 계책을 써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복수전을 흥미롭게 펼친다.

B.C. 453년 강력했던 진(晋)나라가 한(韓)·위(魏)·조(趙)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춘추시대에는 패자들이 힘이 약한 주나라 왕실을 존중한다는 관념이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관념이 없어지고 오로지 힘과 힘이 대결하는 약육강식의 양상이 펼쳐진다. 전국 7웅은 위의 세 나라 외에 진(秦)·초(楚)·연(燕)·제(齊)의 7국이다. 이 가운데 초기에 패자의 자리를 다툰 것은 위·제·진 세 나라였다. 제나라는 유명한 병법가 손빈의 계책을 써 위나라 장수 방연을 마릉의 싸움에서 패사시키고, 진(秦)의 효공은 법가인 공손앙(公孫 , 商 )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일대 정치 개혁을 실시하여 천하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져 갔다.

부국강병의 추구와 권모술수가 소용돌이치며 명군과 명신들, 명장과 명장들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근 2백 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의 힘은 점점 쇠약해져 차례차례 진나라에 멸망해 버리고 B.C. 221년 제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대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다.

진(秦)나라 시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진의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승상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모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군 몽염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의 대공사를 감독토록 하였다. 시황제는 자기의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고, 아방궁의 건설과 여산릉의 공사 등으로 3백여 만 명의 노동력 동원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과중한 조세 부담과, 가혹한 법과 형벌로 온 천하는 마치 감옥과 같았다.

진왕조의 지주 정권과 농민간의 모순은 시황제가 죽은 다음 해인 B.C. 209년에 마침내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반란을 신호로 각지에서는 진나라 타도를 외치는 반란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고 유방과 항우도 이 때에 봉기하여 여러 제후들과 함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게 된다. 유방의 진영에는 소하, 장량, 한신 등의 명참모·명장이 있어 유방을 잘 보좌하였고, 항우의 진영에는 범증이 자주 계책을 진언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문의 만남에서 유방은 죽음의 위기를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모면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위기를 맞았으나 명참모들의 계책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처음 유방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날이 갈수록 유리해져 유방은 마침내 궁지에 몰린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완전 고립시킴으로써 오강에서 최후를 마치게 한다. 이 유방과 항우의 싸움은 소설 《초한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엄격히 말하면 진나라 타도의 수훈 갑은 항우임에 틀림없었으나 마지막 승리의 열매를 거둔 것은 전한 왕조를 세운 유방이었다.

전한시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장사 항우를 물리치고 漢나라를 세운 한 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의 장점을 살린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왕조 초기에는 한신·팽월·경포 등 前漢 창업의 일등 공신들을 차례차례 숙청하였고, 흉노와는 화친책을 썼다. 한고조가 죽고 난 후는 그의 처 여후(呂后)의 집권 시대가 당분간 이어진다. 여후는 유방이 사랑하던 여인들과 그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황자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 죽이는 방법도 참혹한 방법을 썼다. 그뿐 아니라 여씨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는 등 여씨 세력의 포석에 적극적이었다.

여후가 죽자 여씨의 정권은 무너지고 다시 유씨의 천하가 되었다. 문제, 경제의 선정이 이어져 천하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경제 때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에 오초 7국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주발의 아들 주아부에 의해 쉽게 평정되었다.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는 창업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정책을 펴 전한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화친책으로 일관해 오던 대흉노 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여 위청·곽거병 등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여 전한의 위력을 크게 떨쳤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장건(張騫)은 역사상 유명한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선구가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도 무제 때 이루어졌으나 국내적으로는 무고의 난이 일어나 황태자가 살해되는 등 불상사가 많았으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신들의 희생도 많았다. 무제가 죽고 여운의 시대가 지난 다음 제 14대 평제 때에 이르러 외척 왕망(王莽)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제도 개혁의 실패로 혼란이 가중되어 15년만에 망하고 광무제 유수(劉秀)가 후한을 세우게 된다.

후한시대

後漢의 창시자 광무제 유수는 남양 호족 출신으로 왕망 정권의 제도 개혁 실패와 잇따른 실정으로 도처에서 반란군이 일어나자 그도 한왕조 부흥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봉기하였다.

처음 그는 경시제 유현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곤양의 싸움에서 중국 전사상 최소의 병력으로 최다의 병력을 무찔러 그의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 후 왕랑과의 싸움, 적미군과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 왕조를 창시하였다.

광무제 유수는 천하가 일단 평정되자 내치에 힘을 기울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경제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어 갔다. 어진 임금 밑에 어진 신하가 있듯이 광무제 치하의 중신 가운데는 어진 사람들이 많아 정치는 더욱 안정되어 갔다.

특히 반초는 오랫동안 두절되었던 서역 제국과의 교역과 개척에 필생의 정력을 바침으로써 전한 시대의 장건과 함께 실크로드의 개척자로서 청사에 길이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는 문란하고 사회는 점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외척 양기에 이은 2차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로 당시 백성들이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있던 인물들이 애석하게 희생됨으로써 정국은 더욱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거록 사람 장각이 태평도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세력을 확장하더니 급기야는 정치적 단체로 변신하여 184년 후한 왕조 타도를 외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황건적이라 불렀다.

이들 황건적은 정부군과 정부를 지지하는 군벌들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후한 왕조는 이를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황건적의 반란은 후한 왕조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 되어 마침내 삼국정립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업적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채륜이 종이 제조 기술의 개발에 성공하였다는 사실과 혼천의·지동의의 발명 등 과학의 발달과 한방 외과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는데 이들 할거 세력들은 동탁의 난을 계기로 그들의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 천하를 삼분하여 나라를 세운 촉한(蜀漢)·위(魏)·오(吳)를 三國이라 한다.

이 삼국 가운데 중원 지역에서 기선을 제압한 것은 위의 조조였다. 조조는 당대 일류의 전략가로 전투시에는 항시 진두에 서서 장병들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는 장안에서 도망해 온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맞아들여 천자의 명을 빙자하여 군웅들을 호령하였다. 당대 최고의 명문 출신 원소를 관도의 대전에서 격파함으로써 중원 통일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 후 승상이 되어 권세를 휘둘렀고 208년 천하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대군을 강동으로 출동시켜 손권·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일대 결전을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조조의 천하 통일의 꿈은 깨어지고 대신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촉한의 유비는 제갈공명을 삼고의 예로써 맞아들이고 오나라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서서히 기반을 구축해 갔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공명은 후주 유선을 도와 중원 회복을 목표로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충정이 넘치는 출사표를 올리고 6차에 걸쳐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의 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장원의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또한 오나라의 손권은 그의 형 손책이 죽은 후 가업을 이어 강동에서 오나라를 세워 산월족을 귀순시키고 강동의 미개발 지역을 개발하여 그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형주의 영유권 문제로 형주를 지키던 관운장을 맥성에서 생포하여 죽임으로써 유비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결국 유비는 이 싸움에서 패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병이 들어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이들 삼국은 반세기 동안 역사에 각각 그들의 발자취를 남겼고 마침내는 오장원에서 제갈공명과 오랫동안 대치했던 위나라 대장군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서진 시대

호족 출신 사마의는 조조 이래 위나라에 벼슬하여 249년에는 승상이 되고 이후 그의 아들 사마사·사마소 등이 사실상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마소는 촉한을 토멸한 공로로 진(晋)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염은 265년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西晋 왕조를 세웠다.

무제 사마염은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즉위 초에는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으나, 점점 사치와 방탕에 빠지자 귀족들도 다투어 사치와 부를 마치 무슨 경쟁이라도 벌이듯 과시하였다.

특히 천하의 부호 석숭과 왕개의 사치 싸움은 당시의 부패상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국정은 점점 문란해지고 제실의 울타리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여 마침내는 영가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을 부르고, 영가의 난이 서진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중국 북부에서 五胡十六國 時代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이미 중국 내륙에 많은 이주민을 보내고 있던 유목민족은 무력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산서지방의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고 북한을 세웠다. 그의 아들 유총이 311년 낙양을 함락시키고 영가의 난을 계기로 서진의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어 장안에서 즉위했던 민제도 316년 북한의 유요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서진은 52년만에 멸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왕실의 일족인 사마예는 건업(남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왕도 등 중원의 호족과 토착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317년 동진을 세움으로써 중국 북부의 오호십육국과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 분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동진·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이 기원 316년에 멸망하자 서진의 일족인 사마예는 317년 건업을 건강으로 개명하고 이 곳을 수도로 동진을 세웠다. 사마예는 동진의 관중이라 불리는 왕도의 도움으로 강남 지방 호족들을 복종시켜 동진의 기반을 튼튼히 해 나갔다.

동진 정권이 수립된 후 6년째에 동진의 중신 왕돈이 형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공략·함락시키고 반대파 중신들을 죽이거나 추방하였다. 동진의 황제 사마예는 왕돈의 반란에 심한 분노를 느껴 발병하여 죽고 그 후 왕돈의 난은 평정되었다.

동진 정권의 권력에는 북방에서 내려 온 호족 왕씨와 강남지방의 호족세력이 2대 지주를 이루었는데 약 1백년 동안은 왕씨 일족과 그 뒤를 이은 유씨, 사씨, 환씨 등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동진은 끝내 중국 북부를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나 383년에는 비수의 대전에서 전진왕 부견의 대군을 연파함으로써 양자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동진은 말기에 이르러 南朝 송(宋)을 세운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하였다.

한편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 북부에서는 흉노·선비·갈·저·강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년간에 걸쳐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를 오호 십육국이라 부른다.

이들 이민족은 일찍이 후한 말·삼국시대에 이미 중국 북부에 이주하여 한민족과 섞여 살다가 서진 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304년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산서에서 독립하고 316년 그의 아들 유총이 서진 왕조를 멸망시킨 이후 중국 북부는 분열 상태에 빠져 오호 십육국이 각지에 할거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진이 한 때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으나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에게 패함으로써 통일의 꿈이 와해되었다. 다음으로 선비족의 척발씨가 세운 북위가 점점 강력해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439년 다시 중국 북부를 통일함으로써 오호 십육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중국 북부는 북위가 통일하고 중국 남부는 송의 유유가 통일함으로써 南北朝時代가 열리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

南北朝時代는 東晋 왕조가 멸망한 때부터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문화의 소개는 편의상 육조시대(오·동진·송·제·양·진)에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남조는 동진 왕조에 이어 강남 지방에 세워졌던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개 왕조를 말하고, 북조는 오호 십육국의 혼란을 통일한 북위(北魏)를 비롯하여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다섯 왕조를 가리킨다.

연대적으로는 북위가 북부 중국을 통일한 439년부터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되어 남북조로 갈라졌던 중국이 통일된 589년까지의 약 150년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특징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이에 따라 사회의 혼란이 극심하였다는 점이다.

남조의 지배계급은 북부 중국에서 이주해 온 귀족들로서 전통있는 문화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고, 북조의 지배계급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민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남조에는 문학·예술이 크게 발달한 데 비하여 북조에는 한문화의 섭취에 힘썼으나 특별히 발전된 것은 없었다.

남북조 모두 불교가 융성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남조의 양무제는 즉위 초에는 명군으로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으며 남조시대 불교를 공전의 전성시대로 만들어 황제보살로 불려지기도 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부정 부패를 막지 못해 자신은 물론 국가까지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대의 문화는 육조문화라 일컬어 중국문화의 중심이 황하 유역으로부터 강남지방(양자강 유역)으로 옮겨져 화려하고 정교한 육조문화를 이룩하였다. 문학에는 전원시의 창시자이며 귀거래사·도화원기로 유명한 도연명, 서도에는 書聖 왕희지, 회화에는 畵聖 고개지 등의 명인이 배출되는 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수 . 당 시대

수(隋)나라를 세운 수 문제는 그 때까지의 악정을 과감히 개혁하고 정치에 정진하는 한편 북쪽으로 호족들을 물리치고 남쪽으로 남조 최후의 진(陳)왕조를 멸망시켜 근 4백 년 동안 이어오던 대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군주로서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과 지방 행정의 간소화를 실시하고 군사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병농일치제를 실시하였다. 또 경제면에서는 요역의 경감과 세금을 감소시킴으로써 문제의 선정이 실시된 지 20 수 년 후에는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여 역사상 선정으로 일컬어지는 개황의 치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조급한 중앙 집권제의 강화로 남쪽에서는 반항 운동이 일어나고 안으로는 수왕실 자체에도 내분이 일어났다. 604년 문제가 병상에 눕게 되자 황태자 양광(나중의 양제)이 문제를 시해하고 수나라의 2대 황제가 되니 이 이가 그 악명을 떨친 수의 양제이다.

양제는 제위에 오르자 동도의 건설과 대운하의 개설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상 위대한 사업을 성취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운하의 개설과 동도 건설의 토목공사 때문에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인공산의 축조와 이궁의 축조공사, 몇 만 척에 달하는 용선의 건조, 만리장성의 축조 공사 등으로 수십만 수백만의 인부가 동원되어 요역은 일종의 재난으로 화하였다. 이같은 요역에 이어 3 번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급기야 각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각지에서 호족과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웅이 할거하는 가운데 양현감, 이밀, 이연 등이 군사를 일으켰다. 618년 양제는 강도에서 친위군에게 시해되고 그의 손자 공제가 낙양에서 자립하였으나 619년 반란 세력인 왕세충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한편 장안을 함락시킨 이연은 공제의 아우를 황제로 옹립하였다가 그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하니 수나라는 겨우 3대 39년만에 멸망하였다.

당나라 시대

당(唐)의 고조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움에 있어서는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의 활약이 컸다. 당나라 건국 후 이세민의 신임을 질투한 태자 건성이 세민을 제거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세민은 기선을 제압하여 현무문에서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제거하였다.

그 후 고조는 세민을 태자로 세우고 그로부터 2개월 후 제위를 세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서 은퇴하였다.

태종 이세민은 제위에 오르자 안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당왕조 300년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또한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의 세제와 부병제의 실시, 과거 제도의 확립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하여 역사상 선정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의 치를 이룩하였다.

제 3대 고종의 집권 후부터 고종의 황후 측천무후가 고종을 대신하여 정권을 전횡하다가 690년에는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주(周)라 칭하였다. 그러나 705년 측천무후의 정권은 물러나고 당왕조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중종의 황후 위씨의 전횡으로 정치는 다시 문란하였다. 이 때 즉위한 현종은 정치를 개혁하여 국력의 충실을 기하자 당왕조는 다시 중흥되어 개원의 치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현종은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양귀비를 총애하여 간신을 중용함으로써 정치가 문란해지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급기야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안사의 난은 9년간 계속되어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난에 이은 번진 세력의 발호와 이민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은 마침내 875년 황소의 난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난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884년에 이르러 겨우 평정되었으나 당왕조의 지배력은 극도로 약화되어 황소의 난 토벌에 전공을 세운 절도사의 한 사람인 주전충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중국 고유의 문화가 개화된 시기로서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를 비롯하여 산문의 대가 한유·유종원, 서도의 대가 구양순·안진경 등이 배출되었다.

송나라 시대

송(宋)의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명군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영명한 점으로는 당태종 이세민을 능가한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조광윤은 제위에 오르자 문치주의로 무인 세력을 억제하고, 중압집권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뒤를 이은 동생 태종도 태조의 유업을 이어 중국 통일의 여세를 몰아 후진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바쳤던 연운 16주의 수복을 꾀하여 요와 싸웠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진종·인종 시대에는 국력이 신장되고 번영하였으나 요와 서하의 침입을 받는 등, 인종 만년부터는 급격한 군사비의 지출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그 뒤를 이은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부국 강병을 위한 신법을 단행하였으나 구세력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 없이 폐지되고 말았다.

그 후 12세기 초엽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북부 중국에 침입하여 1127년에는 송나라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흠종이 포로가 되어 연행됨으로써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이 때까지의 9대 168년 간을 역사상 北宋이라 하고,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강남으로 난을 피하여 임안(항주)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이은 후부터를 南宋이라 한다.

남송은 금나라를 물리치기 위하여 주전파인 악비 등이 분전하여 한때는 유리한 형세를 형성하였으나 강화파인 진회 등이 정권을 잡아 오로지 강화 정책만을 고집하여 주전파인 악비 등을 모반죄로 몰아 죽이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소강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몽골이 서하·금나라 등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남송에 침입해 왔다. 남송에서는 항전파인 문천상·장세걸 등이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9대 152년만에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송나라는 문화 국가를 표방하였으므로 이 시대에는 많은 문인·학자가 배출되어 여러 가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자치통감》의 사마광,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 당송 사대가인 구양수·소동파 등은 이 시대의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원. 명시대

몽골 초원의 영웅 징기스칸은 무력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세조 쿠빌라이는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여 칸의 자리에 오른 후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고치고 수도를 연경(北京)으로 옮겨 大都라 칭하였다.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자 이에 반발한 캐로코룸파의 왕후들이 아리크부가를 칸으로 추대함으로써 원나라 후계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그 후 여러 한국(汗國)은 독립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후 고려를 복속시키고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원정군을 보냈다. 그의 치세 35년간은 원의 황금시대로서 동서간의 교류가 활발해져 원의 수도 대도에는 유럽 각국에서 온 색목인(色目人)이 자주 눈에 띄었고 외국 상품이 거래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도양을 통한 해상 무역도 활발해져 천주(泉州)는 해양 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처럼 동서의 교류가 활발해진 데는 원나라가 장악한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대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역전 제도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 이렇듯 동서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역사상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원나라 체류와 그의 구술로 엮어진 《동방견문록》은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원나라의 정치제도는 중앙에 중서성·추밀원·어사대를 두어 3권을 분립시키고, 지방에는 行중서성을 두어 중앙에서 관장하였다. 원나라 사회제도의 특징은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의 네 계급으로 구분되어 각 민족간의 차별이 엄격하였다. 몽골인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관의 중추를 독점하였고 보좌역인 차관급을 색목인이 담당하였다. 한인·남인은 간부직에 등용되는 일이 없이 가장 천대를 받았다.

원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제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과 라마교 숭배에 따르는 퇴폐적인 악습으로 국력이 쇠진하여 명나라를 일으킨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하였다. 원나라가 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해 놓고도 중국을 통일한 지 불과 90년만에 멸망한 것은 그들의 정치가 거칠고 낙후된 생활에서 얻은 유목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즉 황제란 천하만민의 복리 증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중국 고래의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었다는 것이다.

원대는 문화는 중국의 전통적 학문인 경학이나 사학 등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희곡은 매우 발달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명나라 시대

明의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의 정치가 문란하고 국력이 쇠진한 틈을 타 한족 국가 부흥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일어난 백련교의 한산동·유복통을 수령으로 하는 곽자흥의 부하가 되었다. 주원장은 차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면서 장사성·방국진 등의 군웅을 물리치고 1368년 명나라를 세워 남경에 도읍하였다. 이어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막북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즉위 초기에는 원나라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얼마 후 황제 직속하에 6부를 두고, 군사를 통괄하는 5군도독부를 두어 군사·행정의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홍무제는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온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감세와 면세를 실시하고 수리 사업과 개간 사업을 추진하여 생산 촉진에 주력하였다. 태조 홍무제는 자신이 죽은 후 공신들의 발호를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창업의 공신들을 숙청하여 주씨의 명나라를 반석 위에 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손자인 건문제 때 '정난(靖難)의 변'이 일어나 연왕 주체(燕王 朱 )가 영락제로서 제위에 올랐다. 영락제는 용맹 과감한 제왕으로서 변방을 침범하는 몽골의 잔존 세력을 완전 섬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몽골에 친정하였고, 鄭和로 하여금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일대와 인도양 일대를 활약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으며 《영락대전》을 편찬하였다.

영종 때에는 환관 왕진의 발호로 국정이 문란하였고 몽골 오이라트부의 침입으로 '토목의 변'에서 영종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겪었다. 헌종 성화제와 효종 홍치제의 치세를 명나라의 안정시기로 일컬어진다. 그 후 정덕제가 즉위하자 다시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부패하였고, 특히 천계제 때의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횡포는 극에 달하였다.

신종 만력제가 즉위하면서부터 동북쪽에서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그 세력을 확장하더니 끝내 중국을 침범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백성들의 과중한 세 부담과 심한 기근으로 농민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 반란 가운데 특히 이자성은 그 세력이 왕성하여 마침내 북경성을 점령하자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명나라는 17대 277년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산해관 총병 오삼계(吳三桂)의 반민족 행위로 인해 북경에서 쫓겨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마침내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청나라

오삼계의 반민족적 행위로 난공불락의 산해관에 무혈 입성한 예친왕은 손쉽게 북경에 들어가 이자성을 몰아내고 淸왕조가 명나라의 뒤를 승계한 중국의 정통 왕조임을 선언하였다.

1644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제 4대 강희제 때에는 명의 유신들이 세운 남명 정권을 완전 소탕하고 오삼계 등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였다. 또 러시아의 침공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써 제지하고 외몽골·회부 등을 병합하는 한편 대만의 정씨 정권을 평정함으로써 중국 지배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강희제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1백 년 동안은 청의 전성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기간에 청의 영토가 현저히 확대되었음은 물론 군주권이 강화되고 여러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국가 재정이 충실하였다.

청나라는 원나라와 같이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한 민족이었으나 한족 지배 정책에 있어서는 그 궤를 달리하였다. 원나라가 철두철미하게 몽골 민족만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정치상의 결정권을 모두 몽골 민족이 장악한 데 반하여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협동으로 정치를 수행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희·옹정·건륭의 시대를 거치면서 창업 당시의 청신했던 기풍이 점점 사라지고 사치 풍조에 젖어 들면서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군의 근간을 이루었던 팔기군이 부패해지면서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 국내의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1840년에 있었던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는 거대한 중국의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청조는 더욱 궁지에 빠졌으며 1856년에 일어난 애로우호 사건으로 영·불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더욱 중국의 무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겨우 평온을 되찾아 동치 중흥을 꾀했으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좌절되고 열강의 중국 진출이 현저해져 중국 요지에 대한 조차와 할양 등으로 중국 전토는 열강들에게 잠식되기에 이르렀다.

1900년에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열강의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청조는 입헌정치의 준비를 서둘렀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에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청조는 막을 내렸다.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시대의 《강희자전》과 건륭제 시대의 《사고전서》 등 대편찬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1월 손문의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는 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당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의 독재와 집권욕 때문에 민주주의 건설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대국적인 시세를 판단한 손문은 한때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주자 원세개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황제 제도의 부활을 꾀하는 등 정권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하였고 1917년에는 장훈이 선통제(청조의 마지막 황제)의 복위를 꽤했다가 실패하였다.

그후 단기서·오패부·장작림·풍옥상 등의 군벌이 권력다툼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 틈을 노린 일본은 독일이 소유했던 산동반도의 권익을 승계하는 한편 중국에 대하여 21개조 요구 사항을 승인하도록 강요하였고 군벌 단기서와 결탁함으로써 중국 진출에 성공하였다.

1923년 이후 세계 열강들은 다투어 중국에서의 이권 쟁탈에 주력하였고 이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지식인·학생·노동자들은 외세 배척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919년의 5·4운동과 1925년의 5·30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1924년 국민당 제 1회 전국 대표 대회가 열려 제 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고, 1925년 손문이 죽은 후 국민당은 광동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926년 북벌을 개시하여 상해·남경을 점령하였다. 북벌군 사령관 장개석은 上海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 정부를 수립하여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손을 잡은 무한정부와 대립하였으나 얼마 후 무한 정부도 공산당과 결별하고 남경정부와 합류하였다. 그후 북벌이 재개되고 1928년 장작림이 봉천에서 폭살되자 중국 전토가 국민당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남경을 수도로 하는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국민정부는 9·18사건(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서안사건을 계기로 제 2 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공간의 반목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국공합작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국공 양측은 미국 특사의 중재로 정치 협상 회의를 열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국공내전으로 번져 국민당 세력은 대만으로 이동하고 공산당은 1949년 10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中華人民共和國을 수립하였다.

대만으로 이동한 국민당 정부는 5권 분립주의 아래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중국 공산당을 구원한 홍군

蔣介石이 공산당과의 국공합작을 깨고 1928년 6월 단독으로 北京의 군벌들을 쳐부쉈을 때, 그와 국민당의 기세는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제 중국의 새 지배자는 장개석임이 분명해졌다. 승세를 몰아 장개석은 공산당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이 소탕작전은 1930년대 초 여러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고, 막강한 화력과 병력에 대항할 힘이 없던 중국 공산당은 위기를 맞았다. 공산당은 하는 수 없이 장개석군을 피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대탈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장정이란 이름은 훗날에 중국 공산당이 결국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 당시 이 행군은 참담한 패주였다. 누가 보아도 싸움은 끝났고 승리자는 장개석이며, 중국 공산당의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한 알의 불씨에 불과했던 공산당은 마침내 소생하여 광야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절대 열세의 싸움에서 공산당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던 것일까. 그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紅軍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홍군이란 집단의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도덕성, 강인함, 철의 규율이 그 힘이었다.

홍군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 군대가 가히 지상 최고의 군대였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홍군 병사(그들은 자신을 전사라고 불렀다)들의 평균 연령이 20세가 채 안 된다는 것이다.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병들이 매우 많은 수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소년병들이 이미 7∼8년의 전투 경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농민 출신이 가장 많았고 수공업자, 마부 출신도 있었다.

홍군 장교들의 평균 연령 역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24세 정도에 불과했다. 이들 가운데는 과거 국민당군이었던 장교가 3분의 1가량 있었고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졸업생과 프랑스, 소련, 독일 유학생 출신자들이 많았다. 현재 중국의 원로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때 홍군 장교였었다.

이처럼 가장 어린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임에도 홍군의 규율과 도덕성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가 힘든 것이었다. 점령 지역의 여자들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국민당군이나 일본군과는 전혀 딴판으로 홍군의 병사들은 농부의 아내나 딸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에 폐가 될 것을 염려해 노숙하기 일쑤였다. 병사 대부분이 미혼이었지만 이들은 어떤 마을에서든 여자 문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없었다. 홍군의 실상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미국의 신문기자 에드거 스노는 홍군 병사들이 대부분 동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여자뿐 아니라 담배나 술에 대해서도 초인적인 자제력을 보였다. 담배나 술이 공식적인 금지 사항은 아니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상습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었고 술에 취해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러니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던 일반 민중들이 누구에게 지지를 보낼 것인지는 뻔했다. 노인과 어린아이들조차 홍군을 위해 망보는 일에 앞장섰고 마을 주민 모두가 홍군의 정보망을 형성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주민들은 홍군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에 대해 훗날 국민당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륙에서 패배한 것은 바로 백성들과 제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홍군의 강함은 또한 장교들의 헌신적인 태도에서 나왔다. 특히 이 점은 병사들의 식량을 빼앗아 사복을 채우는 등 온갖 부정과 비리로 악명 높았던 국민당군의 장교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면이다. 홍군 장교들은 당시 중국에 있던 각 지역 군벌 등 모든 군대를 통틀어 전사율이 가장 높았다. 다른 군대의 지휘관들은 "진격하라"고 뒤에서 명령하지만 홍군의 지휘관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맨 먼저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장교의 전사율이 5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홍군 지도부는 장교의 손실을 우려했지만, 이 같은 현상을 변하지 않았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장교, 머리나 얼굴에 흉한 상처가 남이 있는 장교들은 아주 흔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일반 병사와 함께 자고 함께 먹었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똑같이 나누었다.

홍군은 계급의 승진과 강등을 전적으로 전투 공로에 따라 실행했다. 이것은 국민당군이 학벌이나 재력에 따른 것과는 달라서 홍군의 병사들의 전투 의욕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국민당군에 쫓겨 연안(延安)을 향해 하염없는 대탈주에 나선 홍군에게 물자를 대주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소련이나 몽고와의 국경 지역은 국민당군이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럼 홍군의 보급원은 어디였을까. 재미있게도 그것은 다름 아닌 국민당 군대였다. 홍군은 주로 영국, 체코, 독일제 총을 보유했는데 이것들은 바로 장개석 정부가 공산당 토벌을 위해서 대량 수입한 무기였다. 장개석조차 홍군의 화력이 패주한 국민당군이 버리고 간 무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인정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홍군은 국민당군을 '탄약 운반대'라고 조롱했다.

홍군은 무기는 빈약했지만 이같이 조직이나 사기 면에서 최고의 군대였기에 공산당은 승리할 수 있었다. 국민당군의 장군들조차 대만으로 쫓겨난 뒤 출판한 책에서 홍군이 곤란과 희생을 피하지 않은 훌륭한 군대였다고 회고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user.chollian.net/~khj909/lishimain.htm#진(秦)나라%20시대  


Comment ' 2

  • 작성자
    Lv.1 철동
    작성일
    04.08.15 20:34
    No. 1

    원나라가 왜 자꾸 중국 역사로 들어가는건지 모르겠네요. 다른 시대는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원나라는 엄연히 몽골의 역사이고, 몽골은 아직도 독립국으로 남아있는데요.
    설사 지나족이 자기네꺼라고 우긴다고해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을바에야 지나족이 고구려를 자기네거라고 우긴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임준후
    작성일
    04.08.16 08:53
    No. 2

    대륙의 역사를 중국사로 볼 수 없을 뿐더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국사를 한족 중심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한족이 권력을 장악한 중국은 출현한 지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의 청의 지배층은 한족과는 전혀 무관하죠. 청과 현재의 중국은 동일한 국가적 연속성이 없습니다. 중화민국 건국의 이념은 반청복명, 한족의 나라를 이룩하자는 것이었죠.
    한족이 역사를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있지만 중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족이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했던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그들이 시조로 삼는 전설상의 황제 헌원의 성은 공손인데 본래 한족엔 공손이라는 성씨가 없다고 합니다. 공손씨는 선비족의 복성중 하나죠.
    그 이후의 하, 상, 은이 동이가 이룩한 국가라는 것은 이제 중국 사학자들도 인정하는 추세고요.
    중원을 통일했다는 진의 시황 영정의 조상인 대업은 발해연안의 씨족출신이어서 그 뿌리가 한족일 수 없는 자고, 한을 세운 유방도 그 조상이 한족인지 의심스럽다는 중국사학자들의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는 사람이고, 위를 세운 조조도 한족이 아닌데다가, 수를 세운 양씨는 선비족이고 당을 세운 이씨도 선비족의 혼혈이며, 요, 금, 원, 청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조와 오대십국 중 장강이북을 장악했던 국가들은 모두 북방이민족이었죠.
    한족이 대륙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격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주장에 동조할 이유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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