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그는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로 불린다. 44년만의 아시안컵 정상 탈환의 꿈이 물거품됐지만 축구팬은 그의 부활을 보며 희망의 꽃을 피웠다. 꼭 6년 전에도 그랬다. 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0-5 참패를 보면서도 축구팬은 겁없이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열아홉살의 그를 보고 위안을 얻었다. ‘라이온킹’ 이동국(25·광주상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부상에 부진, 그럴 때마다 부록처럼 따라왔던 각종 루머와 비난들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던 그가 아시안컵에서 부활을 알렸다.
■ 짠돌이 상병
“머리에 젤 좀 바를까요?” 부시시한 머리를 자꾸만 올려봤더니 못 견디겠는지 한마디 한다. “군인이라서…”하면서도 쓱싹쓱싹 재빠르게 머리를 매만진 후 화장실을 나온다.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고들 하는데, 스스로 달라진 점 세가지만 꼽아보라고 했다. “우선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것같아요. 사실 예전엔 거만했었죠. ‘내가 이동국인데, 내가 최곤데!’ 하는 생각이 강했고. 그런데 고개를 숙이는 게,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거라는 걸 군대 와서 알게 됐어요. 두번째는, 음, 머리가 짧아진 것. 그리고 세번째는 많이 짜졌다.(짜졌다고?) 빈대 붙는 거 있잖아요, 흐흐” 상병 월급을 물었더니 3만원이 좀 넘는단다. “(김)남일이형이랑 밥 먹은 다음에 ‘형, 잘 먹었어!’하고 그냥 나오구요, 해외 전지훈련 가는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옷이랑 신발도 공짜로 얻었구요. 돈 쓸 일이 없어요.”
■ 폐인의 추억?
미안했지만,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최종엔트리 탈락이라는 ‘쓴 약’은 돌이켜봤을 때 그에겐 돈 주고도 살 수 없었던 ‘명약’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저더러 빨리 잊어버리라고 해요. 하지만 전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아요. 힘들 때마다 ‘폐인의 생활’을 기억하면서 ‘그 때보단 힘들지 않잖아!’하고 스스로 얘기하거든요.” 폐인의 생활. 스물다섯 젊은이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 한켠이 저릿했다. “눈 뜨자마자 술부터 찾았어요. 마신 게 아니라 그냥 부었죠. ‘어디, 나 없이 잘 되나 두고보자’며 화를 내기도 했고. 그런데 축구 잘 할 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랐는데, 막상 힘들 땐 주위에 아무도 없더라구요.” 그런 그에게 부모님은 가장 큰 힘이었다. “부모님께 불효했죠. 저때문에 전화도 가려서 받으셔야 했고. 하지만 부모님은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는다’고만 말씀하셨어요.” 최근 미스코리아 출신의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였는데 힘들 때 위로를 많이 받으면서 가까워졌어요. 지금은 매일 통화하면서 잘 만나고 있구요. 그런데 거기까지. 그냥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 하쿠나 마타타!
그는 올해 초에 본 사주 풀이가 좋았다면서 가지런한 이를 다 드러낸다. “지금까지는 운이 나빴는데 올해부터 확 트인대요. 부상도 끝났고. 저를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기분이 너무 좋더라구요, 하하.” 다른 건 둘째치고, 독일월드컵이 있는 2006년까지 운이 좋을 거란 말이 무엇보다 기분좋은 눈치였다. “포철공고 3년 때 제 이름이 새겨진 프로 유니폼을 처음 받았는데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었다,벗었다, 혹시 이름이 떨어지지 않았나, 유니폼이 없어지지 않았나 자다가도 확인하고…. 그때 생각하면 더 잘해야겠다 싶죠.” 그는 “사람들은 저를 ‘게임은 못해도 골을 잘 넣는 선수’라고 하죠. 그런데 이젠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게임을 잘 하고 싶거든요. 요즘엔 아프지도 않고 감도 좋아서 축구할 맛 나네요”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언킹’에서 아기 사자 ‘심바’에게 친구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흥겨운 노래를 들려준다. “하쿠나 마타타, 걱정하지 마. 남은 인생, 근심 걱정일랑 없다구∼ 하쿠나 마타타!” 어린 심바에서 용맹스런 라이온킹으로 거듭나려는 그가 이 노래를 들으면 더욱 힘이 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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