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우리동네엔 동철이란 소아마비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를 형님이라 불렀으니 틀림없이 삼촌뻘이지만 나는 그를 동철이형이라 불러야 했다. 그가 자기를 삼촌이나 아저씨로 부르는걸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에게 다정했던 동철이형이지만 동네에선 난봉꾼으로 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부리는 성질은 다소 이해 할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장애인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고 보면 그당시를 능히 생각해볼수 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나름의 자신감은 세상과의 괴리가 있었을 것이다
길을가다 나를 보면 언제든지 불러서 백원을 쥐어주기도 했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는것도 잊지를 않았던 사람이지만 술 한잔 들이키고 나면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
낮부터 시뻘개진 얼굴로 낫을 들고 온 동네를 쏘다니면 사람들은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어느날부터 술은 커녕 온종일 실실거리며 다니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그에게 절대 술을 팔거나 주지 않는 탓이기도 했지만 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에 다니던 영임이 누나가 마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릴때의 내 기억으로도 매우 미인에 속했던 그녀는 부산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앉은뱅이가 되서 돌아왔다. 내가 들은바로는 오금의 힘줄을 절단한 뒤 되붙혀서 영영 두다리를 펼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그를 내가 본것은 어느 어스름 저녁에 절뚝거리는 그가 영임이 누나를 업고 가는 모습이었다. 일제 때 간척한 뚝방길을 걸어 만조의 바다에 뜬 달구경이라도 하러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행복해하던 동철이형에게 문제가 생긴 건 그녀가 나를 불러 대신 전해주라던 편지를 그에게 주고난 후 였던 것 같다.
영임이 누나는 더이상 동네에서 볼 수가 없었고 동철이형의 광태는 전보다 더 심해졌다
동네선 술을 구할 수 없었던지 면소재지인 학교근처에서 종종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난 하교길에 술에 잔뜩 취해 있는 그를 보았다
웃통은 이미 어디서 벗어 제꼈는지 얼굴부터 온통 시뻘개진 모습을 하고선 한손엔 깨진 병조각을 들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고 그는 더이상 화풀이할 상대가 보이지 않자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면지서까지 뛰다시피 걸어갔다
지서앞에 폼을 떡 하니 잡던 그는 순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오자 큰소리로 외쳐댔다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그가 마을로 되돌아 온건 거의 일년이 다 돼서 였다
감옥소가서 국보법 위반으로 6개월을 살다 나왔다지만 동네엔 한참뒤에야 나타났다
되돌아온 그는 더이상 술을 먹지도 광태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툇마루에 앉아서 먼산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나는 이사를 하게됐고 몇년 뒤 명절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죽게 만든것이 장애인을 거부한 세상인지 영임이 누나인지...아니면 감옥소의 6개월간의 고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드디어 국보법 폐지 입법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고 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어릴때 기억을 꺼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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