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란 부분은 퀘스트님이 오해하셨습니다. 그냥 문장 말미에 '다'가 붙는다면야 이는 조선 시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였도다 그렇소이다 등등. 그런데 제가 말한 '다'란 평서형 종결어미로 쓰이는 '다' 입니다.
我 朝鮮人으로 議하야도 朝鮮人 三字가 第一 重大한 公稱이라.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 중 한 부분입니다. 지금 같으면 문장 끝에 '이다' 라고 쓰겠지만 이 글에서는 '이라' 라 하고 있습니다.
"나과 누으님조차 가면 가려니와, 내 혼자는 못 갈노라."
하시니, 우흔 더옥 텬지 망극히 우오시더라.
계축일기 중 한 부분입니다. 지금이라면 '우시었다' 정도로 마무리가 되겠지만 이 글을 쓴 궁녀는 '~더라' 란 어미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이던 '더라'가 이광수의 무정 출간 이후 점점 줄어들다 거의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이전에 '~더라' 쓰이던 곳이 '이다' 가 쓰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후 일본 유학파인 김억의 시나 유학파가 만든 동인지 '창조'를 보면, 그 이전의 문헌들과는 - 소설만이 아니라 평론이나 시 등 - 어미 사용이 확연히 달라지고, 이 차이는 바로 10여년 전과 비교해도 너무나 큽니다. 1900년대 초 대한매일신보의 사설과 1920년대 동아일보 사설을 보면, 이 두 글이 쓰인 시기가 20여년밖에 안 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이러한 어미 사용법의 변화, 더 나아가 문체의 변화가 '무정' 한 작품으로 비롯되었는가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다'의 용볍이 이광수의 무정에서 처음 나타났고, 이 용법이 지금 우리 글쓰기으 기본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다'의 용법이 일본어의 종결어미 'だ'의 영향을 받았음도 부정하기가 힘듭니다. 일본 유학파의 전면적 등장 시기와 평서형 종결어미로 쓰이는 '다'의 등장 시기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주격조사 '가' 가 수상하다 하셨는데, 주격조사 '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문헌은 1572년 송강 정철의 자당인 안씨부인이 쓴 서간입니다. 이후 17세기 무렵에 y 반모음으로 끝나는 주어 뒤에 쓰이다 지금같이 받침 없는 주어 모두에 쓰이는 용법으로 사용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격조사 '가' 가 어디서 등장했는가 하는 건 아직 논란거리입니다. 이전에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어의 영향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이 조사가 처음 등장한 문헌이 임진왜란 이전 문헌입니다. 게다가 실제 입말로 쓰이는 말이 문헌으로 나타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단 사실까지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애매합니다.
남편이 반말하고 아내가 존대하는 걸 일본어의 영향으로 보시고 상호 존대를 전통적 어법으로 보시는 거 같은데, 이 역시 단언하기 힘듭니다. 월인 석보를 보면 남녀 대화에서 상호 경어체를 쓰지만 남자 쪽은 두루 낮춤을 쓰고 여자 쪽은 극존칭을 쓰는 장면이 있습니다. 궁궐의 예를 드셨지만 궁궐같은 경우 어느 나라이든 예법이 특히 강한 곳이고, 양반가 같은 경우도 예법을 따지던 곳입니다. 변강쇠전에선 강쇠와 옹녀가 같이 경어체를 쓰지만, 강쇠보단 옹녀가 더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원래 경어체, 즉 높임법이란 단순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어법이 아닙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상호 존중으로 쓰는 것이 경어체입니다. 그런데 하게체 같은 아랫 사람을 존중하는 용법 사용은 거의 사라지고 윗사람에게 쓰는 용법만 쓰이다시피 하는 게 근래 모습입니다. 퀘스트님이 말하신 문제는 부부간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한국어 경어체 사용 전체의 문제입니다.
저 역시 공부가 부족한 입장이라, 제가 아는 한에서 적당히 말하는 게 고작입니다. 이견 있으시면 말해 주시길.
강호정담란을 잘 안 오기에 답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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