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만 되면..어쩐지 감상적으로 되어갑니다. 오래간만에 비도 그치고 화창한 날이었는데..한순간 기분이 추욱 가라앉는군요. 부모님에게도 동생엥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마음..그냥 한 번 주저리 주저리 써봅니다.
아직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회사도 쉬시는 날인데 말입니다.
요즘 아버지는 볼링에 푹 빠져계십니다. 예전엔 볼링을 쳤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어머니는 좀전에 들어오셨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피곤하신 몸으로 속상한 일이 많았다며 한탄을 하시는 어머니를 봅니다. 느이 아버지는 아직 안 들어오셨냐며, 한숨지으시는 어머니를 봅니다.
제 나이 올해로 열일곱,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만, 나름대로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나이입니다. 나날이 가라앉아만 가는 집안의 분위기...저라고 못 느낄 리가 없습니다.
저와 제 동생이 어렸을 때 아버지는, 회사가 쉬는 날이면 하루가 모자를새라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가족들 다 함께.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땐 정말 즐거웠다는 그것 하나만은 아직까지 뚜렷합니다.
IMF..우리나라 국민 모두를 힘겹게 한 그 물결은 저희집이라고 예외로 치지 않았습니다. 아버진 다니시던 회사를 그만 두시고 택시운전을 시작하셨고, 집안에서 가사를 돌보시던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힘들었지만, 많이 힘든 시기였지만 아버진 회사를 옮기신 후에도 여전히 성실하게 일하셨고 어머니 역시 집안팎으로 신경쓰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습니다. 형편은 조금 어려워졌지만 마음만은 변함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어느날, 외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가신 두 분의 소식이 전화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추운 겨울, 꽁꽁 얼어붙어 있던 고속도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하고자 가까스로 핸들을 꺾은 바람인지 천운인지 어머니는 상처 하나없이 기적적으로 무사하셨지만 아버진 크게 다치시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에 그 정도 상처라면 천만다행이었지만, 다리를 다치신 아버지는 한참을 병원에 머물렀습니다. 수술을 받으시고 어느정도 회복을 하셨지만 아직까지도 후유증은 가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비가 오거나 시린 겨울이 되면 욱씬거린다는 다리를 주무르시는 아버지를 보면 안쓰럽습니다. 회사 일, 가정 일, 여러가지 문제로 시달리시며 피곤해하시는 아버지를 보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유난히 잠이 많으신 아버지가 피곤한 몸으로 겨우겨우 밥상머리에 앉아 꾸벅꾸벅 거의 감기다시피 한 눈으로 식사를 하실 때에는 눈 앞에 뿌얘집니다.
사고 후, 집에만 머물러 답답해 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바둑도 배웠습니다. 그다지 세지는 않으시지만 취미삼아 곧잘 바둑을 두시던 아버지를 위해 6학년이라는 나이에 한참어린 꼬마녀석들과 마주앉아 돌을 쥐곤 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이것마저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냐며 한없이 볼링에 빠져드시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대신 집안을 꾸려나가느라 힘겨워 하시는 어머니. 두 분의 상황에 공감하고 그런 두 분의 마음이 느껴지기에, 어느 한 쪽 편도 들 수 없기에 두 분의 불화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제 그만 아버지가 가정과 회사에 신경쓰시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지만, 하루하루 늙어가시는 아버지를 보며 그런 마음을 묻어둘 수 밖에 없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 일도 제때제때 안 나가시는 아버지, 볼링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 힘겨워하시고 속상해 하시는 어머니.
하루종일 밖에서 돌아다시며 일하시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가사일에 묻히시는 어머니. 소위 바가지라 불리는 것을 긁어대며 잔소리하시는 어머니를 말릴 수가 없습니다. 짜증도 부리시고 화도 내시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속을 달래시는 어머니에게 차마 더 참으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는 자식을 마중나오시는 어머니를 보며 굳이 나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버스에서 내려 가로등 아래 서계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더없이 기쁘지만 그런 이기심에 안 그래도 힘드신 어머니의 짐을 더 지워드릴 순 없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 하루종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기에 바깥일에 힘겨우신 어머니를 알지만 설거지 한 번 조차 제대로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시 그 시절, 걱정없이 환하게 웃던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마주보며 웃으시던 그 때가 다시 올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 때가 온다면, 지금까지 쑥스러워 내뱉지 못하던 말, 언제나 가슴 한켠에 묻어둔채 고이 간직만 하고 있던 그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