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감촉이 만족스러웠다.
특별히 나 자신을 식자(識者)나 책 전문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무심코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래, 무릇 표지란 이처럼 쓰다듬는 것 만으로도 은은히 뿌듯함을 전해오는 것이 바로 일등품이라 할 수 있지.'
손끝에 희미하게 미끄러지는 가공종이의 살결.
지금껏 그 누구도 가까이 허락하지 않았을 알싸한 내음....
뭐 이런식으로...
케이블 홈쇼핑 채널에서 잭필드 3종세트 선전하듯이 새 책을 붙들고 주접을 떠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책을 편다.
작가 서문을 읽고
추천사를 읽고
序章이라는 글씨에 시선을 옮긴다.
페이지를 넘긴다.
단 한마디.
- 그 해의 가을은 끔찍했었다.
왈칵 두려움이 몰려와 이후를 읽을 수 없다.
아... 나는 3일후면 군대에 간다.
지금 이걸 읽어버리면,
그래서 내가 매혹되어버리면 어떡하나?
그러한 두려움.
애써 가슴에 힘을 빼온 나날들,
흐리멍텅하게 간직해온 감수성,
나는 매사에 무감동하게 살아오고 있었다.
활자의 예술적인 나열에도 마음이 이끌리지 않았고
머리속을 휘돌았던 무수한 이미지의 폭풍도 점점 가라앉아 바닥의 더러운 모래먼지가 되었다.
세상을 무채색으로 물들여버리고
몇개의 글자들에는 열광하지 않는다.
글자 몇개를 조합하는 것에 열의를 느끼지도 않았다.
아, 언제부터였던가?
무엇에 상처를 받아서 나는 불구가 되었던가?
왈칵 두려움이 몰려왔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너무나 오랜만에 손에 쥐어든 책이라는 물건에 영향을 받아
나의 모래바닥에 무언가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밤새 무언가 읽고 싶어지고
밤새 무언가 쓰고 싶어지면 어쩌나 두려워왔다.
난 3일 후면 군대에 가는데.
뭐....;;
오래간만에 책을 잡았더니.... 별 해괴하고 겉멋으로 가득한 헛소리들이 나의 상념을 지배하고 있다...
특별히 입대라는 미래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사에 열의가 없어져버린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뭐어...
책을 사놓고 읽지도 못한채 군대에 가버리면 억울하니까...
읽긴 읽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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