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책방에 들렀더니 누가 들여다볼까 구석진 곳에 책 한 권이 꽂혀 있다. 제목인즉 ‘선생님 죽이기’. 때가 때인지라 그 살벌한 제목에 끌려 사들고 와서 읽었다. 덴마크 작가 한스 쉘피그가 쓴 장편소설인데 원제는 ‘잃어버린 봄’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목으로 출판했을까?
코펜하겐 명문 고등학교의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25년 만에 반창회를 열기로 하고 하나 둘씩 만찬장에 모여든다. 모임이 시작되고, 학창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진다. 당시 생활은 오직 공부, 공부, 또 공부였다. 그 공부를 채근하는 여러 선생님들이 희화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모두는 학생들에게 죽일 놈들로 비쳐진다.
“선생들이 없다면 인생은 행복할 텐데…”. 학생들의 불만은 비밀 결사 ‘검은 손’을 조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암호는 ‘블룸에게 죽음을!’. 블룸은 라틴어를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검은 손’ 에드바트는 블룸 선생이 좋아하는 맥아사탕 하나에 구멍을 뚫고 치명적인 흰 가루를 집어넣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은 퇴근 후 산책길에 그 맥아사탕을 먹고 독살된다.
그러나 에드바트는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들을 ‘억압’한 것은 성적, 입시, 교육제도였을 텐데 그 억압은 과연 누가 산출한 것인가. 작가는 후기에서 말한다. “내가 공격하고자 했던 것은 학교와 선생, 혹은 행정당국이 아니라, 사회였다”
학교가 있으면 어디든 ‘검은 손’은 있다. 우리 학교에서 몇달 전에 있었던 일. 아침에 출근하니 학교가 엉망이었다. 학생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며 외친다. “선생님, 학교가 바보 됐어요!”
유리창이 깨지고, 화분들이 몽땅 엎질러지고, 진입로와 벽에는 하얀 페인트로 ‘홍길동 죽어라’ ‘개새끼 홍길동’ 등등이 요란하게 씌어 있었다. 홍길동은 학생주임의 이름이다. 며칠간의 수색 끝에 혁명적 ‘검은 손’들의 신원이 파악되었다. 이들도 역시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 학생주임 홍길동은 자기 직무에 충실했을 따름이 아닌가. 이 ‘검은 손’의 적은 선생이 아니라 학교가 정한 규칙을 이행할 수 없는 나약한 자기 자신들인 것을.
보성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기간제 여교사와의 ‘차 심부름 사건’을 보자. 보도에 따르면 이 조그만 학교에는 ‘차 접대 및 기구관리’라는 사무분장이 있었던 것 같다. 일반인들은 교사는 수업만 하는 줄 알지만 주당 20시간 전후의 수업은 기본이고, 학급 담임 업무량이 상당하다. 특별활동 지도를 위해 뭔가 특기도 하나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이른바 ‘사무’가 하나 더 붙는 것이다. 단위 학교마다 사무의 종류는 거의 똑같으니 규모가 작은 학교일수록 한 교사가 담당할 사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교사의 일이 아닌 것이 사무로 덧붙여지기도 한다. 가령 ‘식당 운영’은 선생님들의 점심 식사를 마련하는 업무다. 매일 식단을 짜고 찬거리를 사고 설거지하고 식비를 거두는 게 일이다. 교사가 할 일인가? 또 ‘교과서 주문’을 보자. 필요한 교과서 수량을 일일이 조사 주문하고 일일이 금액을 매겨 수금한 다음, 교과서가 오면 수요와 공급이 딱 맞게 배부하고 정산까지 해야 한다. 역시 교사가 할 일은 아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차 접대’ 같은 것도 사무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사정을 두루 살핀다면 보성초등학교 사건이 좀 달리 보일 수도 있다. 기간제 여교사는 분노의 대상을 ‘교장’으로 찍었지만 과연 제대로 찍은 것일까? 교사를 교사 되게 하지 못하는 소규모 학교의 실정, 즉 공교육 현장을 이토록 가난하게 방치하는 남루한 사회제도라야 하지 않았을까.
‘선생님 죽이기’를 읽고 나니, 내게는 이 교장 선생님이 불행한 희생양, 또 하나의 블룸 선생으로 비쳐진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제목을 바꿔 책을 낸 출판사처럼 이 비극적 죽음을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세력은 부디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석범/서울 신원중 교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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