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임유아
작품명 : 나이트 인 블랙
출판사 : 드림북스
나이트 인 블랙을 평하다.
서. 태초에 이것이 먼저 있었느니라.
글을 평가해야한다는 입장에 처한다면, 그 시작이 어떤 이유인지를 막론하고 하나의 중압감이 생기게 된다.
글을 잘 썼건 못 섰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도 아니다. 개인의 호불호는, 실제로 지독한 악평을 달아야 마땅한 무미건조한 내용에도 한 줄기 감동의 꽃을 피우는 법이니.
다만, 이것은 하나의 글로, 다른 하나의 글을 재는 일이다.
자.
자가 되기 위해서는,
천칭.
천칭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눈금이, 균형이 잡혀야 한다.
이 평에는 과연 그 눈금이, 균형이 있는가?
그 중압감이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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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주점. 친구여. 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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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꽤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지. 근방의 물레방앗간 치고 그 사람의 땅에서 난 곡식을 빻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신기한 일이지. 죽음 직전에 무얼 겪었던 것일까? 그 넓던 땅과, 그 많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말이야. 가족들한테도 한 푼도 남겨주지 않았다면서?
게다가 더욱 신기한 건 묻힌 땅이라 이 말씀이야.
교회당 뒤편이 아니라 저 산골 깊숙한 동굴이라니.
으스스 하잖아. 캄캄한 동굴 안에, 그것도 덩그러니 관 하나만 있고.
또 누가 알아? 그 안에 평생 모은 재산을 꾹꾹 눌러 담았는지도.
꽤나 지독한 사람이었으니 죽을 때 그 놈의 재산도 함께 가져가려 했을 거야. 하고도 남지. 암. 모르긴 몰라도 그 사람은 그럴 만 해.
어. 이봐. 왜 그래? 갑자기 왜 일어서? 어딜 가는 거야?
설마 거길 찾아가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이봐. 농담이라고. 농담!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야. 정말이지 진짜로 그랬겠어? 어. 이봐. 야. 얌마!
자식. 가 버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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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입구. 어둠으로 들어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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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을 보는 사람에게 조금의 친절함을 주고자, 두 가지의 사전설명을 하고자 한다.
하나는 이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은 비난보다는 칭찬이 많은 소설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굵직한 것은 “흐름”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흐름이 참 좋다.
흐름은 가독성이나 재미의 문제가 아니다.
글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혹은 모니터) 위라는, 상당히 평면적인 곳에서 펼쳐지지만, 작가들이 그런 글을 쓸 때는 입체적인 곳에서, 아니 입체를 뛰어넘는 또 다른 무언가의 커다란 장(場)에서 나래를 펼친다.
작가는 글을 쓰기 이전에, 그 내용을 그 넓디 넓은 공간에서 펼쳐 내는 것이다.
그 공간.
이 글은, 두샤라는 작가는 그 공간에서 펼쳐낸 이야기를, 끊기지 않고 글로 옮기는 재능을 가졌고, 또 보여주었다.
흐름이라는 것은,
작가가 “소설”이라는 이름에 담긴 모든 장면을, 그가 생각하고 상상해냈던 모든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저 단순히 잘 옮긴, 그런 말로 대신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 스스로에게, 또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길. 그것이다.
그런 것은 재미와 상관이 없다.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상상을 작가가 보여줄 수도 있고, 재미없다 생각하는 장면을 또한 그려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전달에 있어서는, 작가의 태초의 상상에서, 작가와 글이라는 물리적 장애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한 번이라도 두샤 작가의 글을 읽을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말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임을 앞서 밝혔다.
그럼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 주는 친절함은 무엇인가?
이 책은 그런 독자들의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만큼, 찬사를 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작품을 떠나, 이 작품. “나이트 인 블랙”이란 작품은,
칭송에 넘칠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 글은 그것을 밝히기 위해 쓰였고, 또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쓰였다.
이 두 가지의 친절.
이것을 앞에 둔 것만으로도, 당신은 지금 이 평을 읽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대여! 그 컴컴한 곳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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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초입. 어둠속에서만 크게 느껴지는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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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적인 구성, 튼실한 세계관, 작가의 뛰어난 필력, 등장인물의 생생함.
나이트 인 블랙, 혹은 두샤 작가의 작품을 통틀어 흔히, 그리고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찬사의 어구들은 이 정도로 추릴 수 있다.
한 작가가, 하나의 수작으로도 잡기 힘든, 그 여러 이점을 모두 갖고 있는 그(혹은 그녀)의 작품을 칭찬일색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 지금의 일이다.
물론 이유가 있다.
독자들의 칭찬이, 이런 후한 평가가, 한푼 한푼을 벌기 위해 타자를 두드리는 알바의 한스러운 삶이 녹아있는, 씁쓸한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분명 있다.
생각해 보라. 한 나라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몇 권의 책이 필요로 할까?
취재라는 것이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흔히 소재를 모으는 작업이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당신이, 의사인 주인공, 그리고 병원인 배경을 다루기 위해서는, 필요최소한으로 익혀야 할 것들. 취재는 바로 그러한 작업들을 위한 일, 아니 그 자체이다.
판타지는 기존에 있던 지식에서 나온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허구, 사실이 아닌 것들 투성이다. 그것은 무형이다.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으며, 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것은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하다.
그 그릇은, 아이러니 하게도 현실이고, 또한 사실이다.
판타지에 나오는 나라는, 현존하는 나라가 아니지만,
현실에 존재하거나, 존재 했었던 나라를 터로 삼아 세워진 것들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판타지에서 한 나라를 써내려갈 때, 작가는 있지도 않는 나라를 어떻게 취재하여 써야 할까. 비록 내 상상의 산물이지만,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그리고 살아보지도 못했던 나라. 지식의 전무. 그러나 그곳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더 많은 책.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이야기, 그리고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두샤 작가는 그것을 해냈고,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그의 나라는 온전한 것이다.
단지 그 뿐이다.
그것은 칭찬받을 일도, 또한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당연한 것이다.
단지 그 뿐 아니던가?
그런데도 두샤 작가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런 당연한 일들을, 너무 당연하게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사용어에 대해 한 줄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학소설을 쓴다면, 여러분들은 그 글을 짓궂은 희극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판타지는 상상. 그 자체라는 생각 아래, 모든 억지를 투여하며, 배움도,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는 “글쓰개”들의 장중한 “유성(有聲)무언극(無言劇)”의 형용모순에 투성이인 지금에서, 겨우 그런 지금에서, 두샤 작가를 향한 찬사는 지극히 상대적인 반사이익일 뿐이다.
그의 소설은, 난작(亂作)들이 판치는 어둠 속에서만, 크고 넓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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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안. 횃불의 빛은 작디 작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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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동굴의 중간에 들어선 이들에게, 횃불을 건네주고 싶다.
보아라. 지금 나이트 인 블랙의 "도입부" 설명이, 어둠을 조금씩 살라먹고 있다.
나이트 인 블랙은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는 기사였지만, 기사로 죽지 못했다.
반역자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 그 죽음에 진실과 명예를 찾기 위해 소년은 기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는 역적의 일족을 멸하는 국법을 피해, 그리고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 줄, 그의 아버지의 스승을 찾아간다.
처절한 배움. 그 과정의 심오함보다, 그 의지로 이룩한 실력.
소년은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총명한 인물로 거듭난다.
오로지 기사가 되어,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는 길. 복권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그를 만류하는 스승을 떠나 그가 선택한 것은 기사시험.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명예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역적의 아들이라는 조롱과 멸시는 끝내 그에게 기사시험의 합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참함. 그리고 처절함.
하지만 또 다른 분노와 의지가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의 아버지를 버린, 역적의 자식이라 그를 손가락질 하는 국가를 위해, 그리고 그가 믿고 지키는 기사의 명예를 위해, 그는 기사시험장을 뒤로 하고 떠난다.
그가 간 곳은 국경의 작은 마을. 대국의 침공으로 위태로운 마을을 위해 헌신의 전투를 감행한 그는, 결국 열세를 극복하고 대국을 격퇴하며 마을을 지킨다.
그리고 그 공훈은,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공훈은 결국 그를 기사로 만든다.
1권의 3분지 1. 분량으로 따지면 그 정도 되는 내용이다.
그 이후의 일을 적는다면, 이는 지나친 공개가 되어버리는 일이기에, 잠시 어스름한 내용의 횃불은 꺼두고자 한다.
주인공의 이름도, 등장인물도, 국가도, 마을의 지명도 모두 이 작은 횃불 안에 밝히지 않음은, 그것들이 빛을 밝히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로 답하고 싶다.
이 도입.
이 도입이 또한 한 개인의 일대기로서, 몰입과 감성을 주는 탯줄인 것이며,
또한 “관뚜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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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앞. 그대여. 시체를 보려면 관을 열어야 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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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 뚜껑을 천천히 열어보자.
제법 못질이 잘 돼 있지만, 하나하나 찬찬히 훑어간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도입부 줄거리의 부분에서는 평범함이 물씬 묻어 나온다. 그것에는 어떠한 기발함도, 또한 어떠한 신선함도 없다.
멸망한 가문. 그리고 이를 일으키기 위한 생존자의 처절한 사투.
듬직하게만 보이는 명예라는 말도, 중세로망스의 값싼 6,000원짜리 단골메뉴다.
게다가 단 몇 년의 기간 만에 다른 이들보다 월등해지는 주인공의 능력은, 먼치킨이나 이능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주인공”으로 비춰질, 그나마 매우 인간적인 설정으로 알려진 상태다.
기사도 로망스의 커다란 도식. 그중 가문복권, 주인공의 재능, 능력발휘와 인정 등은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니, 서정적 판타지의 진화라거나, 치명적이 어둠의 노래라는 것은, 듣기에도 민망한 판매용 문걸이에 지나지 않는다.
딱히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지만, “레베카 가블레”가 쓴 “포르투나의 미소”라는 것도 비슷한 도입을 갖는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아버지. 그것으로 인해 가문의 몰락과 함께 영지를 떠난 영주의 아들. 그리고 여동생.
다시 영지로 돌아온 그가, 말단의 신분으로 점차 대공에게 인정을 받아 기사가 되고 아버지의 누명을 되찾는 여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기사의 진실된 명예. 그리고 주인공의 탁월한 영지관리능력과 전쟁수행능력까지!
그러나 이것은 표절도, 또한 레베카 가블레에게 보내는 작가의 오마쥬도 아닐 것이다.
중세로망스의 전형. 그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골격이 이처럼 특이할 바가 없는 이 소설을, 구태여 침을 바르며 칭찬하는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 당연함의 충실성?
소재변용의 능수능란함?
하지만 정작 이유는 전과 비슷한 것이다.
외적 배경을 설정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들인 작가의 놀랄 만큼의 노력.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적 인물을 완성하는데 들인 작가의 고민과 성찰.
글을 쓰는데 들이는 시간보다도, 글을 되짚는데, 아니 그 글의 원천인 생각을 되짚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작가의 당연하고도 당연한 작행(作行). 이 곳에서라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하나의 의무가 배경을 만드는 것으로 집중된다면, 명작을 만들고픈 작가의 욕심은 내적인 인물의 표현으로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한 구성보다, 진실된 인물들(혹은 “진실되게” 거짓된 인물들)이 명작의 기반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배경적 준비와는 다르게 인물의 설정은, 경험의 유무와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외형적 취재와는 다른, 내면적 고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값진 지혜다.
글을 쓰는 개별자 하나 하나가 인격을 가진, 인성과 개성의 고유적 소유자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주변과 비추어, 작중의 인물을 만들 수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양판소를 쓰는 사람이든, 희대의 명작을 쓰는 대문호든, 마찬가지이다.
실력의 높낮이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 그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있다.
그리고 두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그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이 글을 지나가는 또 하나의 맥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샤 작가만의 인물은, 앞서 말한 인물들의 역할과는 상관이 없다. 앞서 보여준 포르투나의 미소에서 나오는 주인공과 나이트 인 블랙이 주인공이 닮아있다고 한들, 또한 그것이 도입의 형태까지 유사하다 한들, 내면적 고민과, 그를 짓누를 양심도 또한 다르다. 처지와, 행동이 같고, 또 그로인해 결론까지 같다고 하더라도, 내면으로 녹아낼 수밖에 없는 개별적인 인자의 특성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냐가 다르다면, 그것으로 곧 그 작가만이 담아낼 수 있는 “그 인물”을 찾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 인물”들이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의 장점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누구나 작중 자신만이 그려낼 인물들이 존재한다.
실력이 좋은 작가는 그것을 많이, 혹은 잘 보여줄 뿐이고, 그렇지 못한 작가는 그런 인물을 적게, 혹은 잘 보여주지 못할 뿐이다. 아니면 아예 보여주지도 못하거나.
두샤 작가는 그런 인물들을 보여주었고, 이 역시 대단한 성의로 찬사를 해야 할 대목이 아닌, 기본을 갖고 최소한을 갖춘 경우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샤 작가 스스로도 “글쓰개”들과 같은 급 내에서 대단한 사람으로 칭송받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작가로서 기본적인 소양은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더 달갑지 않겠는가.
게다가 기사도로망스의 평범한 부분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도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는 생동감 있는 인물들이 없다.
긴박감 넘치는 전쟁. 재미난 대사의 캐릭터. 뚜렷한 목적의 사람들.
하나하나 재미나고 역동적이라고 얼핏 착각이 들만큼, 반짝거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러나 실상 이런 것은, 결국 64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체스(서양장기)의 한 판에 불과하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도, 주변인들도, 하나의 킹이며 퀸이고, 두 개의 나이트며, 룩이고 비숍일 분이다. 그리고 숱하게 나오는 8개의 폰들.
개별의 폰들에겐 이름이 없다. 그저 폰. 그리고 두 개의 룩과 비숍, 나이트에게도 이름은 없다. 그나마 64개의 칸에서,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배타적인 공간이 있기에, 그 위치로써 서로의 이름이 갈릴 뿐이다.
우리는 나이트와 폰을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뿐. 폰과 폰 사이를 나눌 수는 없다.
그리고 두 마리의 위치가 다른 나이트를 볼 뿐. 일정 수 존재하는 나이트 속에,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을 찾기란 어찌 보자면 혹독한 일일 것이다.
역할만 존재하는, 삶이 없는 그저 말의 길.
그것들이 누리는 것은 그저 삶과 죽음, 그리고 행마(行馬). 이것이 전부다.
작가가 인물을 그렸다 감히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서툰 체스판에 꽤나 그럴듯한 설명을 붙인 대국.
그런 한 판의 노름.
대개의 작가가 그렇듯,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전투를 만든 미진함은 이 작품도 피해 갈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지어내는 이야기의 특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전투에서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 것.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전투를 만드는 것.
주인공에서 성공과 실패를 주기 위하여 만든 전투에서도 그대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아마도 전투 그 자체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진실성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통찰이, 눈을 감은 그곳.
주인공을 기사로 만들기 위해 벌인 한 판의 그 전쟁으로, 이 소설은 스스로의 관 치수를 쟀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벌인 전투와 숱한 기사도의 남발 속에, 이야기에 치인 작가가 한 일이라곤 그저 딱딱한 조상(彫像)의 입술에 붉은 혈기(血氣)를 그리는데 만족했을 뿐이다.
도입의 관 뚜껑을 열어젖히고, 협소한 그 공간으로, 눈을 비비고 어둠을 헤쳐서 본 것은,
적어도 내가 본 것은,
알록달록 칭찬과 댓글로 색칠한,
평범한, 그러나 이미 부패해버린 몸뚱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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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속. 부패한 몸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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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훌륭하지만 사자(死者)에게 넘치는 색이었다.
칭찬으로 덧칠된 그 안에는, 지극히 당연한 인간이 들어있었고,
죽어있었으며,
부패하고 있었다.
아니 부패했다.
이 작품의 지극히 당연한 부분을 버리고, 문장과 몰입과, 간간한 재미와 감동만으로 수의(囚衣)가 되어 버린 수의(壽衣)를 입힌 자들.
그것에도 성이 차지 않아, 가까스로 비집고 나온 시체의 육중한 맨몸뚱이를 알록달록 제멋대로 칠한 자들.
대체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음습한 동굴 안에까지 찾아와, 마치 일부러 그런 것인 듯, 이 시체를 부패시킨 외화(外化)의 정체는 어떤 것인가?
살아있을 때, 환호하던 자들의 침묵이 그를 장사지냈고,
더디게만 보였던 그의 부패가, “공유”의 공기를 타고 “확산”되었다.
긴 글에서 보여주듯, 나이트 인 블랙의 기존 평가를 본인은 나름대로의 잣대로 무장해제를 시켰다. 이 작품이 평이하다는 것. 대단한 수식이 붙을 정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 작가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며, 작품의 질과 구성도 평이한 것이다. 인물의 생상함도 조상의 색감에 지나지 않고, 더군다나 내면적인 서술도 작가 본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인물로 인한 특징을 뿐이지, 차고 부족함을 가릴 기준이 되지 못함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글이 주목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당연함이 어느새 대단한 작품이 되어버린 작금의 실태를 깨우기 위함이다.
이 글은 명작이 아니지만, 명작의 지표는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황금이 아니지만, 시금석(試金石)은 될 수 있다.
그대가 황금을 찾는다면, 황금을 알아볼게 해주는 시금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범한 돌멩이지만,
이 작품은 그저 하나의 평범한 작품이지만,
이 안에는 거품과, 허명과, 거짓과, 과장이 있지만,
여기는 뻔뻔할 정도로, 그것들을 지탱하는 굳건한 무언가가 있다.
적어도 손으로 으스러뜨리면 흩날리는 흙먼지를 공중에 뿌리는 그런 소설과는 다르다.
흐름이 좋다.
이 소설은 참으로 흐름이 좋다.
글의 성패와는 상관없이, 이 소설은 흐름이 좋다.
작가가 자신 스스로에게, 또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다.
그 안에, 그가 만들었던 세계가 있고,
그 안에,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안에,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작가에게서 독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더하고 뺌 없이, 온전하게,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지금 그것은 죽었다.
알록달록 추하게 색칠해진 채로.
지금 그것은 죽었다.
부패한 냄새를 풍기며.
평범한 인간이 죽음을 피해갈 수 없듯이,
지금 그것은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에게 색칠이 되어버린 채로, 너무 일찍 부패된 채로 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장송곡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내 입에서 읊조리듯 나오는 이 노래는,
정녕 이 불쌍한 시체를 위한 것인가?
아님 아직도 이 시체를 보지 못한 당신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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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주점.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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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지금에서야 오는 거야? 이봐. 꼴이 이게 뭐야. 흙투성이에. 킁킁. 이 냄새는 또 뭐야.
게다가 안색은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잠깐. 설마 진짜로?
정말이야? 진짜로 그 사람의 무덤에 간 거야? 그리고....... 설마 관을 열어본 것은 아니겠지?
이봐. 말을 하라고. 그래 보물이라도 찾은 게야? 정말 자기 몸뚱이만한 황금덩어리가 있던 거야? 어서 말을 좀 해봐. 궁금해 죽겠다고.
뭐...? 잘 안 들려. 크게 말해봐. 이봐. 좀 크게 말해. 뭘 자꾸 중얼거리는 거야. 왜 그렇게 벌벌 떠는 거야? 뭐 이상한 거라도 본 거야?
시체를 봐서 겁을 먹은 거야? 그래서 한 걸음에 이렇게 마을까지 뛰어 온 거야?
에이. 겨우 그 뿐이라면 진정해. 까짓 거 그래봐야 시첸데 뭘. 자넬 잡아먹기야 하겠어.
여기 앉아서 우선 이거나 한 잔 마시라고. 마음이 진정 될 테니.
이봐. 왜 자꾸 그래. 좀 앉으라니까.
이봐. 이봐. 이거 못 놔. 왜 자꾸 흔들어.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뭐?
뭐라고?
시체가....... 시체가 움직인다고?
여기로 오고 있다고? 빨리 피해야 한다고? 자네 꿈이라도 꾼 거야?
이봐. 나보다 술도 덜 마셨잖아. 질 나쁜 농담은 그만해. 그런 이야기엔 어린애들이나 겁을 먹는다고.
오호라. 내가 같이 안 가줬다고 그러는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턱대고 내 이야기에 금덩이라도 찾을 것 마냥 달려간 자네가 나빴어. 어. 이봐. 좀 놓으라니까. 마시던 건 계속 마셔야지. 시체가 아니라 시체 할애비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대로는 못 가지. 암.
잠깐. 근데 저 앞에 있는 건 뭐야? 저기 말이야. 저 문 앞에.
시커먼 것이 알록달록 이상하게 칠해놨네. 광대인가? 아니 잠깐 낯이 익잖아?
어. 이봐. 왜 그래? 또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이봐! 이봐!
어.......
어...
어?
어!
막. 보지 못한 비명(碑銘)
죽은 것이 산 것을 “붙잡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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