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에는 왠지 빠질 수 없어서 자판을 두드려 봅니다.
저는 차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개중에서도 홍차 류를 좋아하지요. 홍차를 처음 접하던 당시만 해도 립톤 티백이 고급차 축에 들고 수입상품점에서 '홍차'로 유일하게 팔리던 시절이었으니 꽤 오래 되었네요. 지금은 하루 한 포트가 없으면 못살 정도지만 당시엔 무슨 정신으로 그 맛없는걸 마셨는지.
제가 홍차에 입문하게 된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하다 싶은데...
영국 레이디 소설이 절 낚았3.
해적판으로 발행하곤 하던 빅토리아조 영국 아가씨들의 일상을 그린 소설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하얀 테이블 보 위에 티-타이임을 가지는 그네들은 은으로 만든 다기에 크림, 우유, 설탕을 놓고 달콤한 케이크와 뜨거운 스콘, 마멀레이드 잼, 쿠키와 녹인 초콜렛, 그리고 '막 봄의 향기가 느껴지는 싱그러운 홍차'를 내오고 마셨지요.
(종종 미국 레이디 소설이나 근대화 무렵의 소설을 먼저 접하신 분들은 살롱에서 '코오피'를 마시는 모습에 환상을 가지고 계시겠죠 x9)
달콤한 케이크와 수-우프, 쉬폰 드레스 자락따위에 낭만을 품고 자라나는 10대 소녀에게 낚이지 말라고 하는 게 잔혹한 처사일 만큼 환상적인 묘사와 80년대 풍의 (촌스럽지만) 고풍스런 번역이 결합하면 로망이 되는 법입니다.
정작 꿈과 로망을 품고 처음 립톤 티백으로 시작한 홍차는 참 더럽게 맛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낭만과 로망의 맛이랍시고 마시다 익숙해 질만하니, 홍차가 붐인 시대가 되었지요.
수입도 가열차게 되어서 지금은 일본 브랜드의 직영점이 설치되고 백화점에서도 상품 진열대에 이번년도 퍼스트 프레시를 쓴 틴이 진열되고 홍차전문점도 몇 개 정도 생겼고 티 포트와 티 코지를 만드는 법도 얼마든지 인터넷에서 검색이 됩니다.
그런데도 종종-차 타는 법도 몰라서 녹찻물 온도에 우린 홍차를 마신다거나, 도서관에서 복사해온 홍차 우리는 법 같은 걸 들여다 보고 투덜거리면서 '크림'이니 '티 스푼' '은 걸름망'이니 하는 것을 구하려고 씨름하던 때가 떠오르기도 해요. 흥~편해졌네~하는 느낌?
옛날 사람들도 지금 차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저랑 비슷한 마음을 품을 지도 모르죠. 그렇게 쉽게 구해서 쉽게 마시고 맛도 모르면서 차라고 즐기는 게 아냐! 하구요(으하하). 일종의 심술이랄까 올드팬의 투덜댐이랄까 하는 것도 있지만 지금의 차 문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시대가 변해서, 이제 우리나라에도 나름 '차문화'의 턱이 낮아지고 있다는 얘기니까요.
덤. 최근의 저는 집 근처에 생긴 전통차 라인의 찻집에서 보이차를 마시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86년산 백차가 다관당 만 오천원이라는 미친 가격에 제공되는데 마셔줘야 사나이죠. :P!
덤2. 참 글과 관련된 얘기. 제 소설에서 차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묘사가 생각보다 짧은 건!! 쓰다 보면 마시고 싶어서 카드 꺼내서 쇼핑몰 비번 치기 때문입니다. 이상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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