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는 자아의 유지에 절대적 존재임에 분명하다.
어떠한 역사에서도 `독존`은 결국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타자는 어떤 면에서는 타자가 아니라고 보는 바이다.
타자가 왜 자아의 유지에 절대적 존재인가?
타자가 곧 자아의 목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삶의 이유?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런 관점은 인간으로서 너무 슬픈 결론이다. 내가 말하고자 함은 `타자가 곧 자신이다.`라는 것이다.
타자는 분명히 나와 다르다. 하지만 인간을 평하(評下)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를 이루며 산다. 하나하나가 세포가 되어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타자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그것은 마치 간세포든 뇌세포든을 따지는 것이고, 타자와 나는 모종의 연결고리에 얽힌 `몸의 구성원-` 인간은 `1`을 소수로 쪼갠 0.2+0.2+0.2+0.2+0.2 =1의 상태인 것.
타자로서 자아의 유지함에 슬픔을 느끼지 말길 바란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또다른 궁금한 점이 있다면, 왜 인간과 인간은 서로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인가? 인간의 눈과 마음은 또다른 인간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머리스타일이 달라서? 가진 돈의 양 떄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서로 타자로서 인식하는 이유는 학습효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같은 사람에게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자신이 학습하기위해 타자로 인식하는 것. 정상적인 0.2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학습은 왜 하는 것일까?
0.2+0.2+0.2+0.2+0.2 = 1이다. 0.2 하나를 각각 유럽/러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오세아니아의 인간으로 본다. 그들이 모두 같은 0.2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인간이라면 그것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것에 모순이 생긴다?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도 표면과 내면이 있듯, 1에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있다. 그들이 다른 것은 외적인 것으로 서로 공명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학습하고, 결국 외적인 1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희망을 위한 찬가는 내가 문피아 독자 생활을 하면서 읽었던 글 중의 수작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평가한다. 희망을 위한 찬가는 나의 주관으로 볼 때 독자에게 묻고 있는 형식의 글이라고 본다. 편마다 묻고, 또 묻고 어서 결론을 도출해! 하고 말하는 듯한, 말하자면 독자가 생각을 쉴 수 없게 하는, 그런 글이다.
난 - 매우 주관적이지만- 건조함? 나는 희망을위한찬가의 문체에서 건조함을 느꼈다. 아니. 분명 건조하다. 어떻게 보면 건조한 문체는 지금의 희망을위한찬가를 만들 수 있는 글에서 뺄 수 없는, 그런 문체다. 주인공 은결의 그것과 문체가 매치를 이루면서,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난 그에게 댓글한 번 달지 않았다. 그게 너무 미안해서 오늘에야 추천글을 올린다. `작가님, 부디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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