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매프로다이트(hermaphrodite)
제1장 일곱 개의 다리
seven bridges road - fire house
흙먼지 속에서 렌스에 매달린 깃발이 펄럭인다. 흰색 바탕의 천에 헬벤트 대륙 4강에 손꼽히는 헬벤타리아 왕국의 캐터프랙터 기병대의 용맹을 상징하는 황금말의 질주하는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깃발 외부를 장식해 놓은 검정색 솔들이 바람의 방향을 알려준다.
헬벤트 대륙이 성전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말머리는 전선(戰線)인 동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있다.
캐터프랙터 8 기병대장인 레데토 로만 그의 표정이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만큼이나 비장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악의 씨앗이 일곱 개의 다리를 건너게 해서는 안되네...’
성전 때문에 수도방위가 허술해지는 점을 염려해 사령관의 지시에 의해 칸쿤 성에 남아 있게된 자신에게 어느날 갑자기 헬벤트 대륙의 현자인 가탄이 나타나 비장한 표정으로 내린 명령이었다.
성전에 나가 무공을 세워 가문의 지위를 향상 시키고 싶은 공명심(功名心)에 사로잡혔던 8기병대장 레데토 로만은 수도방위의 임무를 맡고 성에 남겨졌다는 게 몹시 불만 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가탄이 부여한 임무는 제 8 기병대장 로만에게는 일생에 몇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기회로 여겨졌다.
좀처럼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탄의 등장이 그러했고, 그가 임무를 부여하며 건넨 황제의 인장(印章)이 그러했다.
사람 손 크기의 원형 메달 안에는 사자의 머리 모양을 한 투구를 쓴 황제가 검을 쥐고 말에 올라 돌격하는 모양이 양각되어 있고 원을 에워싸는 테두리에는 헬벤타리아라는 문자가 교차로 양각되어 있으며 손잡이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조각한 황제의 인장.
기사를 국에 봉하는데 쓰거나, 제후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용하거나, 군대를 출병하고, 대신을 부르며, 외교문서에 사용하고, 신을 섬기는 여섯가지의 용도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황제의 인장.
부절대에 보관되어 있어야할 인장이 기병대장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삿일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기병대장 로만은 가탄의 지엄하고 간곡한 당부를 되새기며 품안에 들어있는 황제의 인장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황금의 촉감이 손으로 전해올수록 그의 가슴은 불처럼 타올랐다.
그 사이 기병대는 어느덧 문명의 문에 다가와 있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온 며칠이었다.
제국의 수도 칸쿤에서 아드리아항까지 87개의 성문을 거침없이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제의 인장 때문이었다.
멀리서 기마대의 모습이 나타나자 문명의 문에서도 병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저건..캐터프랙터 기병대의 깃발이다. 어서 대장에게 알려라.”
“예”
전령은 아웃워크(out work - 본 성 밖으로 나와 있는 작은 방어시설. 보통 성문과 해자를 넘어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성루) 에서 망루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 킵(아성牙城 - 성의 고위직이 머무르는 곳) 으로 달려간다.
아웃워크의 수비대원이 기병대를 멈춰 세웠다.
“제국의 기병대가 무슨일이오?”
“황제의 명으로 비밀임무를 수행하러 일곱 개의 다리로 가야한다. 성문을 열어라.”
레데토 로만의 부관 하시스가 원님덕에 나팔부는 격으로 수비대를 향해 호통을 쳤다.
“잠깐 기다리시오. 우리도 수비대장의 허락 없이는 성문을 열 수 없으니까..”
“저런 무례한 놈을 봤나? 황제의 명이라는 말이 안들리느냐?”
하시스는 딱히 누구 들으라는 목적도 없이 욕 짓거리를 하다가 로만에게 말한다.
“대장, 천하의 캐터프랙터 깃발을 보고도 아웃워크 하나 통과를 안 시켜 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촐싹대기는...기다려라..”
기병대장이 애써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때쯤 망루에서 통과 시켜도 좋다는 깃발이 올라갔다.
“들어가슈”
캐터프랙터 기병대가 줄을 맞춰 정연하게 아웃워크를 통과해 나갔다. 문명의 문은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아웃워크와 망루를 연결하는 진입로(approach ramp)를 지나면 쇠사슬로 여닫히는 70센티미터 두께의 도개교(draw bridge)가 있고 그 안쪽으로 내리닫이 창살문이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망루는 두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첫 번째 망루를 지나야 문명의 문의 성문이 나왔다. 성의 외벽은 모두 월 워크(wall walk) 형식으로 병사들이 지나 다닐 수 있게끔 연결되어 있었고 내부 공터에는 교회, 취사장, 곡물창고, 회관등의 문화시설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막사와 마구간은 대오를 갖춘 채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아홉 개의 탑은 킵을 겹겹으로 싸고 있었다.
특히 웨스트 마사비엘 숲에서 이스트 마사비엘 왓치 타워(watch tower)까지 이어지는 성벽은 헬벤트 대륙과 할리칼리나 대륙을 잇는 가교이자 인간 문명을 지키는 최후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킵(keep)안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울리히 수비대장은 아웃워크로부터의 나팔소리를 듣고 집무실을 나오던 중 보고를 위해 달려오는 병사와 맞닥뜨렸다.
“무슨 일이냐?”
“성문 밖에 제국의 기병대가 와 있습니다.”
“전갈을 받은 적이 없는데 기병대가 웬 일이지??”
울리히 대장은 투구를 왼쪽 품에 낀 채로 망루로 향했다.
“캐터프랙터 기병대가 문명의 문에 무슨 일이오?”
망루로 올라선 울리히기 기병대의 방문 목적을 묻는다.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다.
“황제의 명으로 성문을 지나야한다. 성문을 열어라.”
“통행증을 제시하시오.”
로만 기병대장의 채근에 대한 수비대장의 응대였다. 로만 기병대장은 울리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품속에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황제의 인장을 꺼내 들었다. 황금 용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 거렸다.
“황제의 인장이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라!!”
뿌우우우뿌우우우우
나팔병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건장한 사내 십 여명이 도개교의 사슬을 묶고 있는 도르레를 풀었다. 기계음을 내던 도개교가 서서히 내려오며 진입로에 연결되고 내리닫이 창살문이 올라간다. 성내로 진입한 기병대의 말 옆구리에 박차가 가해지고 새서미 대평원으로 향하는 북문을 열 것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문명의 문에 울려퍼졌다.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오십여기의 가마들이 문명의 문을 관통해 북쪽으로 내달렸다.
헬벤타리아 제국 최고의 돌격부대인 기병대의 전투력을 한층 향상시켜준 것은 바로 동방의 종마들과 교접하여 낳은 양질의 말들이었다. 오이로파리아나 히나의 말들은 중무장한 병사들의 무게를 잘 견뎌내지 못하고 쉽게 지쳐버렸는데 동방의 종마들과 교접한 이 말들은 명실공히 헬벤트 대륙 최고의 말들이었다.
특히 일렉트라를 쫓기 위해 말들의 갑옷인 샴프레인, 크리니어 따위를 장착시키지 않았고 기사들 역시 최소한의 무장을 했기 때문에 기병대는 달린다기 보다는 나는 것처럼 문명의 문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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