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륙짜기
날줄과 씨줄. 피륙짤 때의 세로실과 가로실을 일컫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실제 피륙을 짜 보지 않았기에 어느실이 시작점인지, 혹은 가로, 세로 어느 쪽을 먼저 시작해도 상관없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기에 위 두 단어를 쓴다는 것에 과중한 부담감과 함께 치기어린 조급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피륙이라는 하나의 완성품 자체를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가로, 세로가 보는 방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가로', '세로'라는 단어들이 단지 구분을 하기위한 표피적인 표현수단일 뿐이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아울러 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기준선이 없다면 말입니다.
'일인무적'은 한 주인공의 성장이야기입니다. 이건 류진님께서도 서문에서 언급하신 대목입니다. 그래서 큰 부담감으로 다가온다고 심정을 토로하셨지요. 따라서 저는 이 성장이야기를 씨줄로 설정하기로 했습니다. 위에서도 피륙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피력했던 것처럼 어느실이 기준이 되는지 모르기에 또는 기준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기에 생각해 낸 고육지책입니다. 가로, 즉 지상, 땅 , 평탄이라는 안정적 이미지와 또 그위에 초석을 다진다는 의미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무림기물을 둘러싼 음모가 날줄로 엮어져 하나의 피륙, 즉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2. 피륙의 질
피륙이라 한다면 미관을 고려치 않고 우선 기능적 측면으로 보면 외부로부터의 보호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라는 조직체를 영위해 나가면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알몸을 보여주지 않기위해 혹은 자연환경의 돌발적인 위해(危害)요소에 대한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피륙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꼼꼼함과 세밀함이 아닐까 합니다.
'일인무적'은 그러나 그런 세밀함과 촘촘함이 좀 부족한 작품같습니다. 기본축인 '성장'에서의 미약한 부분이 보여집니다. 씨줄과 씨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구멍이 커 보이는 형상이라 할까요. 이유로는
첫째로, 무공단련 과정과 실전에서의 괴리감입니다.
주인공이 연경불이권을 익히는 과정이 그다지 면밀하게 언급되어지지 않습니다. 연투로를 익히고 경투로를 익히고 그다음에 견격투, 마지막으로 무극일로에 이르는 과정은 알고있지만 그 무공 투로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 움직임과 연공과정이 비교적 단순나열식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며칠동안 연경불이권을 단련했다, 백부앞에서 시연해보였다 등등 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에 반해 실전에서의 박투묘사는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마치 눈 앞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경극처럼 박진감 넘치고 생동감있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박투를 언급하는 페이지수가 유달리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0년 넘게 익힌 연경불이권을 마치 기초없이 속성으로 익힌 것 같은 중간이 쏙 잘려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주인공이 싸우면서 그다지 큰 상처를 입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고 봅니다.
물론 10여년을 넘게 단련해 온 것이기에 그만큼 완전하고 정제된 움직임이 가능하고 또 그렇기에 별다른 상처가 없이 적들을 일망타진할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중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장이야기라면 계단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듯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져야 할 것인데 그것보다는 나이가 들자 자연히 뒤따라오듯 무공상승이 이루어져 적들과 대치하는 것에 비중을 더 두신 것 같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주인공의 급속한 성숙입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겪은(어쩌면 보편적 청소년기의 다반사) 점(어께?에 난 점)과 성(性 , 혈기방장한 시기에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는 왕성한 성적 상상력 - 백부와 어머니사이의 기묘한 신음소리가 근인(近因))에 의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 능하운은 그것때문에 고민하고 방황을 하게됩니다. 다른방향(백부가 어머니를 치료중이었다 등등)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일축해버립니다. 그러다 군문에 투신하고 있던 자기를 방문한 백모될 여인의 한마디에 갑자기 눈을 뜨게 됩니다.
'젊음과 성숙을 우리는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 자기중심주의가 끝날 때 젊음은 끝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때 성숙은 시작되는 것이다'
-헤세의 '겔트루트'-
위의 경구를 따른다고 한다면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 단계의 성숙이 시작된 격입니다. 백부의 실종을 추적하기로 마음먹지요. 여기에서도 작가님의 날줄에 대한 조급함이 보이는 듯 합니다. 주인공의 성장이야기를 그리고 싶으셨다면 자기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좀더 천착하는 전개를 보여주셨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물론 20대라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한순간의 돈오(頓悟)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고민없이 왜구토벌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던 여건하에서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다지 쉬울 것이라 생각되어지지 않더군요.
3. 주객전도, 을축갑자, 위려마도....
주객전도(主客顚倒)란 말 그대로 주와 객이 바꼈단 뜻이고 을축갑자(乙丑甲子)도 원래는 갑을자축의 순서인데 을축갑자이니 이것도 뭔가 뒤죽박죽을 일컫는 말이고 위려마도(爲礪磨刀)란 숯돌을 위해 칼을 간다는 뜻으로 역시 뭔가가 잘 안 맞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인무적'을 3권까지 읽어보고 나서의 결론은 위와 같습니다. 한 주인공의 성장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오히려 기물을 둘러싼 무린제세력간의 암투를 그리고 거기에 성장이야기를 차용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언급했던 모든 주장들이 다 잘못됐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차피 경험해보지 못한 '피륙짜기'를 차용한 감상이라는 것에 한계가 상존해 있다는 것은 감히 부인하지 못할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방향에 따른 가로줄과 세로줄 뒤바뀜이란 것이 만약 맞다면 또한 어느줄이 시작점인지가 중요치 않다면 제가 설정한 전제와 작가님이 설정한 전제간에 괴려한 간극의 현실 그리고 그에 따른 판이한 감상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지식에서 나오는 경험 그리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위한 고단한 경험의 길이 멀고도 험한 것 같습니다. 일천한 지식에 더 일천한 경험의 소산자의 미천한 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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