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투데이를 보다가 퍼왔습니다...
잘 모르던 내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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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역사를 보면,역사 곳곳에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자취는 차고 넘치도록 보이지만,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그만큼 남성우월적인 사회로 지내왔다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모계사회가 아닌 이상 일처다부제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대목일 게다.
그렇다면 한민족 역사에는 일처다부의 기억이 없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한민족의 역사 중에서 일처다부의 기록은 존재했다. 그리고 확실한 ‘제도’란 틀로 법적으로 보장까지 해주었다. 이 시기가 언제였을까? 바로 신라시대였다. 한민족 역사상 여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기였던 신라시대의 세 여왕들은 ‘법적인 보호’아래서 합법적으로 일처다부제의 수혜(?)를 받았는데,필사본 화랑세기를 더듬어 보면,선덕여왕의 남편들에 대해서 삼서지제(三壻之制 : 서방을 3명 둘 수 있는 제도)란 어구를 볼 수 있다. 제(制)자를 쓴걸 보면,이게 하나의 제도로 볼 수 있는데,그 뒤로 이어지는 진덕여왕,진성여왕의 고사를 살펴보면 신라의 여왕은 남편 셋을 합법적으로 둘 수 있게 규정된 걸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만 보더라도 숙부인 용춘과 흠반,을제를 남편으로 맞아들였고,진성여왕의 경우에도 숙부인 위홍을 비롯하여 다른 젊은이들도 곁에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숙부를 남편으로 둔다는 것이 지금의 시각으론 천륜을 저버린 행위로 보이지만,신라시대의 신분제를 보면,근친혼이 곧 혈통보존의 최선책이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도 나중에 김춘추의 딸,자신의 조카와 결혼하게 된다)
신라의 세 여왕에게만 적용되었던,삼서지제(三壻之制)를 들어서 신라시대의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에도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과 신하들의 비토가 뒤따랐던 것은 국사책을 조금만 떠들어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우리민족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가 권력의 정점에 섰던 시절에 ‘섹스’에 있어서도 ‘여왕’에 대한 대우를 어느 정도 해주었다는 걸 확인하는 수준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이나,그 이전 고려조 때의 왕들이 거느린 수많은 왕비와 비빈들을 생각한다면,신라시대 여왕들에게 허용되었던 삼서지제는 그야말로 ‘맛만 보여준’ 요식행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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