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강대하였던 동이족
우리 민족사를 자주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대외관계사에 역점을 주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는 민족사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많이 받은 비자주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식민주의 사관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인색해야 한다는 것은 식민주의 사관의 영향을 극복하는 첩경이 된다.
동이족은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포함한 그들의 동쪽에 존재했던 외민족을 총칭해서 부른 명칭이다. 중국인들은 자기 민족 이외의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고 하였는데 동쪽에 있는 민족들을 동이, 서쪽을 서융, 북쪽을 북적, 남쪽을 남만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책에 이들 주변 민족에 관한 기록을 남기면서 동이족에 대해서는 동이전을 그들의 역대왕조 역사의 끝에 써 놓았다.
우리 민족은 중국인들의 역사책에 조선족으로 직접 명시된 경우도 있고, 동이족에 포함시켜 언급된 경우도 있다. 그 동이족에 관한 초기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들이 중국 민족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나를 더듬어 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동이족은 이미 은(기원전 2000년경∼1122년) 왕조 때에 중국 민족과 관계를 맺었던 것 간다. 은나라 때의 갑골 문자에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갑골 문자는 당시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왕조가 동이족을 두고 하늘의 뜻을 물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은왕조가 동이를 두고 왜 하늘의 뜻을 물어야 했을까? 그것은 외교 관계 혹은 전쟁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족은 은나라 때 그들의 주변에서 외교 혹은 전쟁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강력한 민족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측 문헌에서 순 임금이 동이 계통이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기록도 다 같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은 왕조를 이어 중원의 주인공이 된 주왕조(기원전 1122∼221년)때에 이르면 동이족의 활동이 더욱 돋보인다. 이 무렵 동이족은 중국 땅의 동쪽 해안 지대의 광범한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발해만을 끼고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로 뻗은 지역은 물론이고, 산동반도에서 회수를 거쳐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에도 퍼져 살았다. 그때에 오늘날의 하남성 지역을 중심부로 하고 있던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는데, 동이족은 동진하고 있던 주나라의 세력과 때로는 대결하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지 얼마 안 된 주나라 초기에 은나라의 구세력이 근거가 되어 소위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그 삼감의 난을 지원한 세력 중에는 동이족이 있었다. 동이족이 주나라에 대하여 적대적인 투쟁을 벌인 것은 이 때만이 아니었다. 주 무왕을 도와 은 왕조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강태공이 오늘날의 산동반도의 제나라를 봉지로 받고, 그곳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강태공의 군대는 '상'이라는 땅에서 동이족을 만나 이들과 거의 1년 반 동안 싸워 정복한 뒤에야 제나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동이족이 당시 중원 땅의 주인공인 주나라에 필적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주공(무왕의 동생으로 조카 성왕을 보필하여 주나라 초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기에 노력한 현신.)이 봉지로 받은 노나라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노나라에 있던 동이족의 반발이 조직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중앙에 있던 주공은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백금을 그곳에 파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럴 정도로 노나라에서도 동이족의 세력이 강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기원전 8세기경의 서언왕이라는 존재를 발견한다. 그는 서이계통의 동이족으로서 회수와 양자강 사이에서 일대 세력을 형성하여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주나라의 목왕으로부터는 무마용으로 영토를 베어 받기도 하였다. 그는 알에서 깨어나 장성하여 활을 잘쏘아 백발 백중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설화에서 보여 주는 바와 흡사하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에 자리잡았던 동이족과 만주·한반도로 이주한 동이족 사이의 근친성을 엿볼 수 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동이족이 원래 중국 서북 지역에서 동북 지역으로 이동 할 때 일부는 중국의 동쪽 해안 지방으로, 일부는 요서·만주·한반도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근친성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과 만주·한반도의 동이족의 근친성과 관련해 산동성 가상현에 있는 무씨사당의 벽화가 만주·한반도에서 보이는 단군 신화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지적과 또 중국의 내지에는 잘 보이지 않는 지석묘가 중국의 동해안 지대에서 산동반도·발해만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연결된다는 지적 등도 음미해 볼 만한 것이다.
앞서 말한 서언왕은 그 후 양자강 주변의 오나라 등의 압박을 받아 그 세력이 미약해졌다고 한다. 중국에 있던 동이족의 세력이 위축되는 때는 전국 시대(기원전5∼3세기)무렵인데 이 때 중국 민족이 제자 백가의 사상과 철기 문명을 난숙하게 발전시켰음에 비해 동이족은 청동기 문명을 벗어나 철기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 지체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즉 중국의 철기 문명 앞에 동이족의 청동기 문명의 정복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거기에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중국안에 있는 이 질적인 소수 민족을 중국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결과 대부분의 중국 안의 동이족은 중국 민족에 분산·편입되어 주체성을 상실케 되었고, 만주·한번도 지역의 동이족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안의 동이족의 일부는 중국 민족에 정복·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요서·요동 지역으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이 점과 관련시켜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했다는 주장(기자 동래설)고 위만이 동쪽으로 망명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다.
우리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오랜 옛날부터 중국 민족에 필적하는 민족이었음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욱 광범하게 경주되어야 한다는 것과 당시 동이족의 역사 전개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우리 민족의 위상을 재검토해 보는 슬기도 필요한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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