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사이에 김용의 영웅문 3부작과 녹정기의 감상을 올렸다. 나의 무협인생은 김용으로 시작해서 김용으로 끝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만큼 나는 김용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 미쳐있었다.
그의 글은 편하다. 편한 가운데에 장중함과 은은한 멋이 어우러져 있다. 여러 재료가 들어가서 잘 조리된 음식과도 같이, 그의 글에는 갖가지 맛이 차례차례 흘러내린다.
그러나 나의 나이가 일천한 탓인지,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나는 김용 외의 중국무협소설을 쉽게 구할수 없었다. 간신히 찾아낸 것이 와룡생의 소설이었다. 그의 소설들은... 뭐랄까, 그야말로 진중한 무와 협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왠지 그의 필체에는 정이 가질 않았다.
고룡이 천재라는 소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김용과 더불어 무협계의 양대산맥, 절대쌍교 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그분은 고룡의 골수 매니아셨다.
매일같이 그분과 언쟁을 벌여야 했다. 결과는 나의 처참한 패배였다. 담임은 김용과 고룡을 모두 독파하고 각기의 장단점을 따져가며 언급하는데 반해, 나만의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던 나는 김용 외의 그 어떤 무협도 손에 들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 독선이고 아집이었다. 김용이 신필임에는 분명하지만 분명 무협계에는 고룡같이 천재 라는 소리를 듣는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제, 나는 드디어 무협을 접한지 11년 만에 고룡의 첫 소설을 손에 들었다.
'신검산장'
글의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주인공이 검을 쓰며 무림 세가의 인물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나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3권짜리 짧은 무협이었기에 나는 3권을 들고 집으로 가 읽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접해왔던 그 어느 무협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다. 김용의 녹정기 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주인공 사효봉은 천하제일검이자 천하제일무인이다. 또한 그는 타고난 미남에 그의 가문은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강호 사대 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명문가이다.
그의 나이 17세때 그는 화산을 꺾어 천하제일검에 올랐으며, 누구도 그의 삼초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잘난만큼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상대와 겨룸에 있어서 신중을 기했고,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로 누구도 그의 삼초를 받아내지 못했지만, 당연히 그와 겨룬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또 그는 많은 여인을 취했다. 그를 보고 부나방 같이 달려드는 모든 여인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을 취하고 난뒤, 그는 여인들을 헌신짝 처럼 버렸다.
인생의 회의로 그는 자신의 모든 영예와 명성, 지위를 버리고, 거지의 생활을 시작한다. 매일을 빌어먹거나 날품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하지만 강호에는 비밀세력 '천존방' 이 나타나고, 천존방의 방주인 천존은 사효봉을 죽이려 애쓴다.
천존의 정체는 모용세가의 여식인 '모용추적'이다. 그는 예전 사효봉의 여인으로 다른 남자와 혼인을 올리기 하루 전날, 결혼식에 참석한 사효봉과 함께 도망친다. 사랑의 힘으로... 하지만 사효봉은 그녀를 한달동안 데리고 놀다가 역시 헌신짝 처럼 버린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본디 영웅호색이라고는 하지만, 호색의 댓가로는 취한 여인들을 첩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통상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방향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인공은 친구의 부인이 될 여인을 혼인식 하루 전날 데리고 도망쳐 한달간 즐길만큼 즐기고 헌신짝 처럼 내버린다.
도무지 천하제일인의 명성에 걸맞는 행동이 아니다.
재미있는 설정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강호를 지배하려는 비밀세력 천존방은 기실 사효봉에게 버림받은 모용추적이 복수를 위해 만든 조직이다. 한 여인의 복수심으로 인해 전 강호가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비렁뱅이 친구의 죽음으로 다시 강호로 돌아오는 사효봉은 자신의 옛 여인이 보내오는 고수들을 상대로 싸워나간다.
고룡은 이 소설에서 무와 협의 기치보다는 인간을 말하고 싶어한다. 멋들어 지게 싸우면서 협과 의를 중시하기보다는 싸울수 밖에 없는 강호인의 숙명을 그리고, 그에 따라 쌓여져만가는 피의 업보와 한 인간의 내면의 고통을 적절히 표출하려는 듯 했다.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아비인 자신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효봉은 이루 말 할수 없는 아픔에 휩쌓인다. 자신의 품에 안겨 환희의 교성을 내지르던 모용추적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거대한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그 또한 사효봉의 가슴을 찢어놓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런 인간만상의 모습은 마지막 권, 절정의 부분에서 두들어진다. 독에 중독되어 사흘밖에 살수 없는 사효봉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만약 네가 사흘밖에 살수 없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라는 물음을 던져 위선과 위악, 거짓 껍데기에 둘러쌓인 인간들의 본면목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가히 무협소설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효봉이 싸우는 모습은 가히 하늘의 신장이라 불릴만 하지만 그의 싸우는 모습 어디에도 호쾌하거나 가슴이 떨림은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 사람과 사람의 정에 대한 애절하면서도 장중한 묘사는 일품이었지만, 무협소설 특징의 긴박함과 멋들어짐은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만 접는다...
...그리고 사족을 달자면, 이 한 작품이 고룡의 걸작의 축에 들어가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작품을 놓고 감히 고룡과 김용을 비교하자면 무(武)와 협(俠)의 면에서 고룡은 김용에게 조금 못 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급한 판단임에는 틀림없다...)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