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이수영
작품명 : 싸우는 사람 1, 2권 (完)
출판사 : 이타카
*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말을 반으로 꺾었습니다. 이 점 너른 맘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이수영님의 작품을 너무나 사랑하다보니 은연중에 과한 팬심이 드러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거슬리더라도 한 빠돌이의 애교로 봐주시면 고맙겠어요.^^;
* 누설은 최대한 피했습니다.
찰나刹那 찰나刹那 줄어드는 목숨.
그럼에도 인간은 눈앞의 단맛에 모든 것을 잊는다.
그것이 인생人生.
1. 들어가며
어떤 소설을 읽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언제나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봐, 어땠어?
머리로 생각하는 건 나중에 하면 된다.
하나의 세상에 뛰어들어 웃고 화내고 날뛰고 슬퍼하던 모든 경험이
가슴 속에서 뒤섞이며 내놓은 답이야말로 순수한 감상이다.
싸우는 사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214번과 키나, 오쿠거와 함께한 여행을 반추하며 내가 내놓은 답은,
와
한마디였다.
2. 거리감 제로의 세계
싸우는 사람은 노예 검투장의 처절한 혈투로 그 막을 연다. 죄수 번호 214번은 오랫동안 싸우고 또 싸웠다. 그가 아는 건 간수가 밀면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 뿐. 그날의 상대는 오크 전사였다. 어이구, 오크 주제에 전사라니. 오크는 췩췩거리며 싸돌아다니다 주인공이 칼질 한번 하면 죽어나가는 잡몹 아닌가. 마법 한방이면 수십 마리가 있어도 단숨에 바비큐가 되는 신세일 뿐.
그런데 뭔가 다른 것 같다. 화려한 삽화에 그려진 오크 전사는 아무리 봐도 오크가 아니라 오거 쯤 되는 괴물.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옆구리를 찌른다. 반격당해 갈비뼈가 부러진다. 방패로 후려친다. 방패 째로 어깨가 으스러진다. 턱을 후려갈기고 배를 얻어맞는다. 바닥에 나뒹굴고 모래를 뿌리고 상처를 후벼파고 비명과 같은 기합과 함께 눈알을 찌르고 목줄을 노린다. 피냄새, 어지러운 시야, 가빠지는 호흡, 부러진 갈비뼈는 내장을 찌르고 마약에 찌든 몸은 고통을 살의로 바꾼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목표도 없고 이유도 모른채 그저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을 되새기며 좁디 좁은 전장에서 살의와 살의가 뒤엉켜 생과 사를 가른다.
스무 페이지. 엄청난 환성 속에서 피로 물든 전장에 버티고 선 214번에게서 떨어져나와 나로 돌아오기까지 딱 스무 페이지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 오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나는 214번과 함께 어떤 맹수보다 흉폭한 오크 전사와 생사결을 벌인 것이다. 검투장으로 향하는 칙칙한 복도와 손바닥만한 하늘, 살기로 빛나던 푸르스름한 눈알과 거친 숨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싸우는 사람을 읽기 전부터 이수영님 특유의 야성을 품은 피와 살의 향연을 기대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액션씬을 읽을 때면 마치 현장과 1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작가의 분신이 서서 생방송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작가의 말주변에 따라 '내용'의 질은 천차만별이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끔씩 바로 옆에서 보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작품을 보면 감탄사를 터뜨리곤 했는데, 싸우는 사람은 아예 한술 더 떠서 내 머리 위에 214번의 거죽을 씌우고 싸우러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듯 하다.
3. 정교하고 치밀한 짜임새
언뜻 보기에 싸우는 사람의 스토리는 무척 단순해보인다. 214번과 오쿠거가 키나와 함께 신전에서 생활하며 그릇된 죽음과 싸우는 한편 과거의 이야기를 더듬어 올라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숨겨져있던 구조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며, 다 읽은 지금은 이 두권짜리 소설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지독하리만치 정교하고 섬세한 안배를 느끼며 그저 놀랄 뿐이다.
죄수번호 214번의 '이름찾기'는 싸우는 사람의 큰 축을 이룬다. 마약에 의해 손상된 뇌는 어렴풋한 기억의 편린밖에 건져올리지 못하고, 그것을 단서 삼아 키나와 214번은 과거를 더듬어 간다. 그 여정에서 214번의 과거에 속한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그려진다.
어떤 이는 가증스럽고, 어떤 이는 사랑스럽고, 어떤 이는 답답하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214번이 자신의 이름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는 변해가고, 그를 바라보는 나도 변해갔다. 하늘에 닿을 듯한 의지에 감탄했다. 더럽고 비열한 인생을 혐오하고, 진창 속의 진주처럼 어렴풋한 배려에 경이를 느꼈다. 무조건적인 선의와 무의미한 악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일이 벗겨질 때마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바뀌어갔고, 그 어질어질할 정도의 치열함에 휩쓸려 넋을 잃었다.
이것이 삶이구나. 그렇게 느꼈다.
214번은 변모를 거듭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이름을 되찾았기 때문은 아니다. 키나와 만났을 당시의 그는 구멍투성이였고, 그것을 조금씩 메꾼 것은 과거가 아니다. 그를 위해 애쓴 키나의 마음이, 오쿠거와 함께 한 치열한 나날이,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은 원망스러운 머리통을 굴리고 또 굴리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그의 의지가 메꾼 것이다. 그렇기에 '키나가 들춰본 아이거의 감춰진 기억은 그가 되찾은 삶 전부를 부정했다'는 작품 소개문의 글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되찾은 삶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기에.
4. 현실같은 환상, 환상같은 현실
완성도 높은 이야기의 바탕에는 탄탄한 설정이 뒷받침되어 있는 법. 흔히 뛰어난 설정/세계관이 지니는 특성은 방대함, 세밀함, 독특함 같은 것이지만 싸우는 사람에서 이수영님의 그려내는 세계는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린다. 1권의 부록인 설정집에는 대륙의 역사에서 다섯 신의 특성까지, 세계관을 이루는 큰 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두었다. 설정집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다보니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졸라서 들은 후 팬픽을 써보고 싶을 정도다.(물론 실제 쓸 능력은 안되니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하며 즐길 뿐)
하지만 작품 내에서 이러한 설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좀처럼 없다.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거리의 그늘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한마디 속에서 느껴질 뿐이다. 다섯 신을 섬기는 종교에 대한 묘사가 특히 인상적인데, 그 중에서도 키나가 섬기는 데스가움의 교리는 압권이다. 마치 죽음의 신을 섬기는 교단이 실제로 있고, 작가가 그들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데스가움의 사제 키나의 삶에는 신을 향한 깊고 깊은 믿음이 드러난다.
설정이 설정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에 느껴지는 탁월한 리얼리티. 자유로운 상상이라는 미명 하에 온갖 공상을 다 끄집어내서 우겨넣고는 대충 이어붙이는 일이 많은 판타지 소설이기에, 환상을 엮어내어 현실로 구현해내는 대가의 솜씨에는 더욱 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최고라 불리는 작가는 다 그렇지 않던가.
5. 싸우는 사람들
214번은 많은 것들과 싸운다. 그는 오크 전사와 싸우고, 어린 귀족소년과도 싸우며, 간수나 경비병과 싸운다. 굶주림과 싸우고 금단증세와 싸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싸운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와 싸우고 보이지 않는 미래와 싸운다. 그의 삶은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누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키나는 그릇된 죽음과 싸우고, 오쿠거는 생존을 위해 싸운다. 떠나간 이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도 있고, 단지 하루를 더 살아 숨쉬기 위해 싸우는 자도 있다. 돈을 위해 싸우고 명예를 위해 싸우고 여자를 위해 싸우고 자신을 위해 싸운다. 이 작품은 치열한 투쟁으로 가득하다.
데스가움은 죽음의 신. 그가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죽음이다. 대체 무엇이 정상적인 죽음인가. 교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산 것이 할 만큼 하다가 죽는 것'.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러니 그의 방문을 받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싸우고 또 싸워라! 그리하여 마침내 끝을 맞이하면 데스가움의 옷자락이 그대를 밤하늘의 별빛으로 돌려주리라. 나는 죽음의 신이 말하는 교리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짙은 긍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한 독자가 내린 답일 뿐. 싸우는 사람을 읽으며 무엇을 느낄지는 각자에게 달린 문제다. 나는 '순수한 나만의 감상'과 '다른 이의 시각'을 따로따로 느끼고 비교하는 데서 또 한번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아직 권두의 추천사도 읽지 않은 상태고 다른 독자들의 리뷰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이 글을 마친 후 느긋하게 읽어보려 한다. 그러니 본 리뷰를 보는 분들도 타인의 감상은 가볍게 흘려버리고 백지같은 마음으로 싸우는 사람을 접해보길 권한다.
6. 맺는 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뛰는 가슴의 고동을 들으니 형언하기 어려운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말려올라간다. 닫힌 눈꺼풀 위로는 그가 인간의 손과 짐승의 앞발로 끙끙대며 장화를 만드는 모습이 선명하고, 그가 만든 장화를 신고 그가 해온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며 따스한 온기에 작은 하품을 할 키나의 모습이 뒤를 잇는다. 마음 속에 또 하나의 보물이 생겼다.
부록01. 책의 외양
일단 두툼하다. 추천사, 설정집, 단편을 모두 포함하여 두권 다 310페이지 정도. 대여점용 장르소설에서 흔히 사용하는 엔터신공은 일체 보이지 않고 페이지마다 글자가 가득하므로 실제 분량은 상당하다.
표지는 죽음의 신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배경으로 214번과 오쿠거가 앞표지와 뒷표지를 차지하고 있다.(단 1권에서는 오쿠거가 뒷표지, 2권에서는 앞표지로 순서만 바뀐다) 첫 인상은 조금 미묘하다. 중후한 색감과 캐릭터는 나쁘지 않았지만, 표지로 독자들을 낚을 만한 구성은 아닌 듯 하다. 얼굴 뭉개진 무진장 심각해보이는 아저씨와 인상 팍 쓰고 있는 이름모를 맹수 조합이니까. 약간의 사심을 담아 의견을 내보자면 두권 다 키나를 중심으로 1권 배경엔 214번, 2권 배경엔 오쿠거 정도가 베스트 조합이 아니었을까 싶다.(작중 비중을 보더라도 키나의 출연이 없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ㅜㅜ)
내가 깜짝 놀랐던 점은 내부에 삽화가 있는데다, 무려 올컬러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퀄리티가 정말 엄청나다. 오히려 표지보다 낫다 싶은 그림도 다수 있었다. 달랑 몇장 넣어주는 수준도 아니고 1권에 9매, 2권에는 11매. 무려 스무 장의 컬러 삽화가 들어가 있고 그 전부가 고퀄이다. 일러스트는 송원석(Song won seok)님이 담당했다고 나오는데 이분 이름은 기억해 둬야겠다. (그건 그렇고 컬러 삽화는 충분히 세일즈 포인트가 되었을 텐데 책을 손에 들고 펼치는 순간까지 몰랐다는 것은 좀 아쉽다.)
종이질은 - 전문가가 아니니 잘 모르지만 - 최상급은 아닌 듯 하다. 살짝 아이보리색이 나고 책 옆구리의 절단면에 미세한 보풀이 있지만 신경쓰이는 수준은 아니다.
가격은 9000원.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이다. 이수영님의 글과 십여 매의 컬러 삽화로 꽉꽉 채운 책이 단돈 9000원. 엔터신공으로 인해 글자보다 공백이 더 많고 교정교열을 하긴 했나 의심스러운 대여점용 양산형 소설도 8000원인데... 이래서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싸니까 독자 입장에서야 반가운 일이지만.
부록02. 개인적인 캐릭터 순위
3위 힉센. 2위 오쿠거. 1위 키나. 주인공이 뭐죠? 먹는건가요? ...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멋진 캐릭터가 많다. (게다가 몰입도가 높아서 214번과 하나된 것처럼 느껴지니 애초에 순위선정에서 제외) 힉센은 미리니름이 될 테니 넘어가고, 오쿠거 정말 멋있다. 그야말로 짐승이라는 느낌. 삶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의문도 없고 가식도 없으며 망설임도 없는 우리 살쾡이 사촌 오쿠거 최고! -_-b 특히 대지신의 기운을 받아 고롱고롱 거리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움.>_<
하지만 그런 오쿠거도 키나에게는 대적할 수 없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자그마한 몸집.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고통을 이겨내고 한없는 믿음으로 삶을 긍정하고 죽음을 수호하는 그녀는, 내게 숲 속의 고요하고 차가운 샘물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어느날 길을 잃고 샘에 퐁당 빠진 물고기때문에 깜짝 놀라면서도 부드럽게, 조용히 품어주었다. 그 물고기는 멍청하고 활동적이라 고요하다는 것도 옛말이 되어버렸지만, 녀석으로 인해 조금은 온기를 품게 되었으니 만족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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