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쟁선계를 다시 펼쳐 들었다.
쟁선계는 소장용이든 대여점용이든 불문하고 나오는 대로 구입하여 내 서재 책꽂이에 말없이 꽂혀, 마치 서방의 손길을 기다리는 새색시마냥 주인의 손길을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
제 1권 첫문장부터 그 수려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노련한 기녀의 축객령처럼...’
술집에 가서 술이 사람을 마실 정도가 되면 이미 머릿속에는 시간의 개념은 존재하지가 않는다. 횡설수설, 중언부언하는 취객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술집 여주인의 언변은 참으로 교묘하다. 취객의 기분을 한껏 올려주면서 은근슬쩍 취객을 밖으로 내 보내는 그 노련함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위의 문장을 확실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기사 문장의 아름다움은 이재일 작가의 전매특허만은 아니다.
냉죽생의 ‘만천화우’, 가인의 ‘무정심삽월’ 및 손승윤의 ‘천도비화수’ 등의 무협에서도 문장의 유려함을 맛볼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일의 문장에 이렇게 감탄하는 것은 그러한 문장 하나하나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일의 문장을 보고 한탄하였다는 좌백의 말이 단지 과장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서재 책꽂이에 쟁선계만 꼽혀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올렸던 베스트 모음에 적시하였던 책들 중 일부분은 구입하였고, 또 계속 구입할 예정으로 있다. 벌써 책꽂이 두칸을 넘어 세칸 중반까지 차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구입한 책들에게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었다. 읽을만한 책이 없을 때 읽기 위해 모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책의 하드웨어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난다.
즉 한상운의 ‘특공무림’만 생각나면 왕짜증이 이는 것이다.
출간되자마자 모두 구입한 책이었지만 더 이상 구입할 생각은 없다. 제본상태가 엉망인 책을 어떻게 계속 구입하겠는가.
구입하고 한참 지난 후 새로 나온 책 중에서 읽을거리가 없어 위 책 1권을 펴 들었는데, 이런 젠장할...제본이 엉망이어서 낙장이 술술 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풀로 붙여 보기도 하고 테이프로 붙여 보기도 하였지만 한 두장이어야 말이지 책 전체가 술술 빠져 떨어져 나오니...이게 뭔가 싶어 2권째를 펴 들자 그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입한 곳으로 달려가 문의하자, 출판사에서 바꿔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책을 가져오면 못으로 박아주겠다는 거다.
이런 식의 제본을 하고도 교환해 주지도 않는 출판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다. 우수한 소프트웨어(책의 내용)를 하드웨어가 따라주지 못하여 상품성을 잃어버리는 하나의 예라 할 것이다.
그와 비교하여 떠오르는 책이 있다. 임준후의 ‘천명’이다. 이 책은 300페이지가 넘는 것도 기분좋은 일이지만 제본상태 역시 단단히 묶여 있어 몇 번을 보아도 낙장의 염려가 없어 보인다. 내용도 좋고 제본상태까지 좋으니 어찌 구입하지 않겠는가.
사실 오랜만에 쟁선계를 펼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여러 사람들의 감상과 추천이 올라온 것을 보고 완간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출간된 것은 모두 빌려와 읽으려고 하였다. 잔뜩 기대감을 갖고 그러나 1권 몇페이지를 보고는 덮었다. 고무판에서 말하는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들고 있던 칼을 청석판에 내리 꽂자, 그를 포위하고 있던 내금위 1만군사가 모두 벌벌 떤다는 설정인가 뭐인가....
작은 바램이 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영원히 펼쳐 볼 기회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그에 필적할 새로운 책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옴으로 인해 옛책을 집어들 기회가 없기를, 그 책 껍질만 보고 지나치기를 영원히 바라는 마음이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