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한 이야기를 떠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대지에 미친 여신 하나 있어 광기어린 절규를 내지르며 다리 사이로 선혈을 흘립니다. 그 선혈은 강을 이루어 대지의 저주를 가로지르는데 세상 모두를 메운 종말을 그 선혈의 강에서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사람들은 그 위에 배를 띄워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연명하는 삶입니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저주가 침범해오고 상류로 올라갈수록 광기에 잠식되기에 사람들은 그 사이 어중간한 곳 어딘가에서 움직이지 않은채 행동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곳에서 항해를 하는 자는 선장 한 명 밖에 없습니다. 각 마을을 오고가며 무역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마을에서 ‘광인’으로 낙인 찍혀진 자들이 향하는 마지막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선장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미치광이(라고 남들이 말하는 사람)들을 모아 (정말로 미쳐버린) 선원들을 만듭니다. 한명 한명 차곡차곡 모으는 선장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미친 여신을 접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만난 여신의 절규를 멈추고 그에 연명해 살아가는 지금의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게 목적입니다. 그것은 오직 파괴와 폭력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변화입니다. 심지어 그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그것 역시 변화의 결과입니다. 선장이 바라는 것은 지금과 다른 미래입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떠올렸을 때 저는 폭력을 감수한 변화라는 개념에 왠지 모를 매혹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을 이어간 지금은 약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폭력을 감수한 변화는 잘못 된 말입니다. 변화가 곧 폭력입니다. 타협을 할 수도, 점진적으로 하려 할 수도, 최대한 마찰을 줄이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정말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그 노력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해서 그 본질이 흐려지진 않습니다. 변화는 폭력입니다.
변화를 나 개인에게 국한시켜 얘기해본다면, 그것은 변화란 지금의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만들어진 나는 그것이 가장 익숙하기에 다시 나를 만든 삶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의 나를 깨부숴야합니다. 내가 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생각으로부터 내가 했을 행동이 아니라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해야합니다. 저라는 사람이 물리적으로 바뀌어서 가장 익숙하다 느끼는 것 조차 달라질 때까지요.
근대화를 겪은 국가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집니다. 바로 그것이 폭력이었다는겁니다. 산업혁명의 본산지인 영국에서조차 인클로저 운동이라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폭력이 그 첫걸음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 혁명정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강요했고 그에 반발해 방데가 일어나자 학살로 억눌렀습니다. 메이지 유신, 러시아 혁명, 모두 유혈분쟁으로 시작해 농민의 쥐어짜낸 피땀을 연료로 이어갔습니다. 폭력은 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까지 바뀌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좀 주절거린 것 같네요. 글을 조리 있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 좀 들쑥날쑥합니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 끄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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