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 제작.
위도 측정에서 오차가 있으나,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당대 한국의 전통적 지도학을 대성한 지도 제작기술의 정수가 들어갔다.
- 원래는 방문자수를 기반으로 한 전국의 맛집 지도였다. 고위관료들을 매수한 점주들이 자기 맛집을 홍보하기 위해 청탁을 했고, 그 사실을 안 김정호가 맛집을 삭제했다.
- 마을 입구마다 장승을 세워 지도상의 표지판 역활을 하도록 했다.
- 주요 도로를 표기하고 10리마다 점을 찍어 도읍간 거리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 등고선이 없지만 대략적인 해발고도를 알 수 있다.
- 분첩절루(分帖折壘) 또는 분첩절첩(分帖折帖)의 방법으로 제책되었으며 접으면 서류 크기의 책이 되어 들고 다니기 용이하다.
- 축척은 약 1:216,000 (《대동지지》와 《속대전》에서는 “주척(周尺)을 쓰되 6척은 1보이고 360보는 1리이며 3600보는 10리로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이용하여 이우형(李祐炯)·성남해(成南海) 등은 축척을 1:216,000으로 보았다. 위의 문장을 확장하면, 1리는 21,600촌이며, 백리척에 맞추어 비교하면 1촌으로 10리, 곧 216,000촌(=3600(보)×6(척)×10(촌))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곧 이론상의 축척이 1:216,000임을 뜻하며, 실제 축척도 그와 비슷하다.)
- 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실학자와 국학자들의 경제적 실용적 관심속에서 제작됬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이 뛰어나고 애국적인 사람을 쉽게 죽이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거짓 일화들을 날조했는데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김정호가 고문받아 옥사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러나 처벌 받았다는 기록 자체가 없으며 대원군에게 지도를 헌상한 이후에도 꾸준히 수정되었다. 규장각이나 비변사에서 국가 중요 기록까지 내와 제공한 신헌과 같은 경우 이후 중요관리로 승승장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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