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게임을 해보시면
신야가 중국의 메이져 군(영천 남양 여남 남군 등등) 과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실상은 형주 남군의 일개 현에 불과합니다.
100개가 넘는 후한의 군. 그중에서도 몇천개로 나뉜 현중 하나인
신야현에서 조조와 맞서고 있던 유비는
뒤로는 그나마 종씨라고 챙겨주던 유표가 사망하고
앞으로는 원씨일가와의 7년간의 전투를 끝맺고 남방을 정리하려는
조조의 야욕에 버틸 재간이 없어
유비는 그 주특기를 살린 도주를 선택하고 맙니다.
물론 도주 전에 유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조조와 싸웠습니다.
신야에서 벌어진 여러전투중 서서와 제갈량의 공적으로 일컬어지는 것들도
실상은 유비가 총지휘하여 이른 값진 승리였죠.
하지만 물량엔 장사없고 마침내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후퇴라는 표현도 뭣하고 남군에 의지하려다 이마저 길이 막히자
강하군(강하군은 남군에 비하면 당시 인구나 자원면에서 궁색하기 이를데 없는 지역)
으로 후퇴하는데... 이때의 유비는 국공내전에서 패주를 거듭하던 모택동이나
원나라 침공에 맞서 끝까지 도주하던 남송정부보다 나을게 없는 상황이었죠.
이런 보잘거 없는 유비를 따라 처음에는 신야현의 백성들이..
나중에는 북형주 10여만의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 이주합니다.
이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유비는 그당시에는 참으로 온건하고 진짜로 인덕을 중시하던 군주였습니다.
물론 이건 그당대의 여러 군주들과 비교평가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자기한테 불리한 점쾌을 친 사람을 죽이려 했다던지
뇌물을 요구한 독우를 매질하고 튀어버린다던지
하는 강성적인 면모도 심심찮게 보여주긴 합니다만
실제로 채량(백성을 상대로한 약탈)을 안한 드문 군주였습니다.
이 약탈이란 개념이 지금에 와서는 당연한거 아니야? 라고 할 수 있어도
보급이 어렵고 길이 험했던 고대에서 현지 약탈은 당대 거의 모든군벌이
행하던 행위였는데 오직 유비만큼은 채량은 금지시 시켰습니다.
그랬기에 유비는 가는 지역의 백성들이 좋아하고 따랐던 거죠.
둘째는
조조의 악명이었습니다.
조조는 망탁‘조’의 라고 해서 한나라 4대 역적을 거론할때
중국역사에서 오랜기간 동안 빠지지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 망은 왕망. 탁은 동탁. 조는 조조. 의는 사마의 입니다.
그만큼 조조는 민중들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대상이었고
중세 중국에서 경극을 연기할때 조조를 연기하는 배우는 날아오는
돌과 쓰레기를 조심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조조 연기하다가 맞아죽은 배우도 있...
그럼 조조를 왜 민중들이 싫어했는가?
1. 서주대학살 껀입니다.
서주대학살은 실제로 한번만 한게 아니라 도겸과의 전투에서 군인이 아닌
백성들을 여러번에 걸쳐 학살합니다. 하여 사서에는 강과 하천이 죽은 시체에
가라막혀 물이 흐르지 않는다. 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특히 학살의 대상이 자국민 학살이라는게 더 경악할 노릇이었죠.
즉 일본인이 한국인을 학살하고 독일인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중국인이 중국인을 학살한 개념입니다.
2. 원소군 생갱사건도 큽니다.
영정의 분서갱유. 백기의 장평전투후 조나라군 생몰. 항우의 진나라군 생몰 다아시죠?
살아있는 사람을 땅에 파묻어 버리는겁니다.
초한대전 이후없었던 사건이 조조 손에 다시 이뤄집니다.
바로 항복한 원소군 7~10만명을 땅에 묻어버린 사건입니다.
이껀은 삼국지 매니아층 외에는 잘 모르는 사건인데 이 일로 하북에서
조조는 서주대학살 만큼이나 큰 악명을 하북지역에도 널리 알리고 맙니다.
이렇다 보니 당시 백성들은
땅한떼기 없고 군사 1만명도 안되는 군벌 유비를 따라 집이며 논밭
다 버려두고서 나섭니다.
조조군 치하에선 죽을지도 몰라 + 유현덕은 믿을만한 사람이야
이렇게 복합적인 내용일듯 예상됩니다.
결과는 해피하지 못합니다.
백성을 버릴 수 없다하여 그들을 이끌고 진군했던 유비는
하루 10리도 가기 힘들었고 목표했던 남군은 커녕
강하군 책임자였던 유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이 와중에 유비를 따라나섰던 피난민이 어떻게 됐는지는
실제로 잘알지도 못하고 기록도 부실하고 관심도 없어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의 양손자이자 10대재벌의 아들인 조조
4대동안 총리.장관직을 5명이나 배출한 집안의 적자 원술
도지사 정도의 직위를 이어받은 손권. 유장
이런 금수저들과 비교해서
동사무소 과장급 아버지를 뒀지만 일찍 여의고
청년의 나이에 가장이 되어 세상의 은.금수저들을
상대로 놀랍도록 끈질기게 싸워온
유비를 백성들은 믿어왔던게 아닐까요?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