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조가 Greenville Club에서 뛰고 있을 때 전날 새로 산 스파이크 때문에 발바닥에 온통 물집이 잡혔다. 그는 스파이크를 벗고 스타킹만 신은채로 시합을 하게 된다. 7회가 되서 그가 3루타를 치고 베이스에 들어올 때 사람들은 소리쳤다 " You shoeless son of a gun " 그는 단지 그 한 게임에서만 신발을 벗고 시합을 했지만 그 후 그는 영원히 "Shoeless Joe(맨발의 조)" 로 불리웠습니다.
조 잭슨은 1908년에 Philadelphia Athletics 에 입단하면서 야구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첫 두해 동안은 마이너를 오가며 단지 10게임에 나서게 되지만 1910년이 되서 Cleveland Naps 에 트레이드가 되고 이듬해인 1911년이 그에겐 첫 메이져리그 풀 시즌이 됩니다.이 해에 그가 기록한 .408의 기록은 아직도 신인최고타율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15년 클리블랜드는 인디언스로 불리게 되고 맨발의 조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가 됩니다.
1917년에는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게되고 그는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로 .307을 쳤습니다.
통산 타율....그의 통산타율은 타이캅,혼스비에 이어 메이져리그 역대 3위의 기록에 해당합니다.
시카고 화이트 삭스는 1900년에 창설된 아메리칸리그의 오래된 구단입니다.
Charles Comiskey가 구단주였고, 당시 팀 이름은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였습니다. 1902년에 현재의 <시카고 화이트 삭스>로 팀 이름을 바꾸었고, 창설되자마자 리그 챔피언에 오르는 등 상당한 전력을 나타내었답니다. 1910년이 되자, 코미스키 구단주는 시카고 남부에 새로운 구장을 건설하고 팀 전력 강화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1915년, 조 잭슨 등 당시 스타 플레이어 세 명을 영입하고 그 결과 1917년 화이트 삭스는 다시 월드시리즈를 재패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문제의 <블랙 삭스 스캔들>이 일어난 1919년, 화이트 삭스는 리그 최고 승률을 거두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아메리칸 리그의 창시자' 밴 존슨과 함께 아메리칸 리그 설립에 공헌하였던 찰스 코미스키는 사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악덕 고용주의 전형이었습니다.
1917년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화이트삭스의 선수들은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수들의 연봉만큼은 전혀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팀 내 최고스타 조 잭슨의 연봉이 채 6천 달러를 넘지 못했고, 대부분에 주전선수들은 3천 달러 정도나 그 이하의 연봉을 강요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해초 새로 영입한 2루수 에디 콜린스의 연봉이 만5천달러에 이르렀으니 다른 선수들의 속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특히 1919년 에이스 에디 시코티의 시즌 30승이 무산시킨 사건은 코미스키가 선수들에게 얼마나 사악한 횡포를 저질렀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1919년 9월 19일 에디 시코티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29승을 따내게 되었고. 당시 구단주 코미스키로부터 시코티에게 시즌 30승을 이루면 보너스 만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당시 시코티의 연봉은 겨우 6천달러에 불과했다) 시즌은 아직 열흘이나 남아있었고 예정대로라면 시코티는 아직 두경기나 선발 출전할 기회가 있어 30승과 그에 대한 보너스는 기정사실인 듯 보였습니다.
24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홈경기에 등판해 7이닝 5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된 시코티는 28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게 되었습니다. 30승을 거두기 위한 마지막 기회인 만큼 시코티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힘껏 던졌습니다.
하지만 2회를 마치고 시코티는 더이상 투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운드를 내려올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투구나 몸상태는 전혀 이상이 없었고 경기는 2-1로 화이트삭스가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경기는 10-9로 화이트삭스가 패하였고, 물론 시코티의 승수는 29에서 머물고 말았습니다.
시코티의 강판에 대해 당시 화이트삭스의 감독 윌리엄 글리즌은 시코티를 10월 1일에 있을 월드시리즈 1차전 선발등판을 대비해 어깨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팀의 1루수 갠딜은 코미스키에게 복수할 겸 도박사 설리반에게 월드시리즈 승부조작을 조건으로 10만달러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갠딜은 우선 팀의 주축투수인 Eddie Cicotte와 Claude Williams를 비롯해서 팀의 주축멤버 5명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조 잭슨의 경우, 갠딜의 제안을 여러 차례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갠딜의 입장에서는 그가 꼭 참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팀의 스타 플레이어였을 뿐만 아니라, 도박사 설리반이 그의 참여를 요구했기 때문이죠.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논란거리가 됩니다.
대체적으로 갠딜이 설리반에게 조 잭슨도 참여했다고 거짓말 했을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 증거로 월드 시리즈 내내 조 잭슨은 다른 선수들이 일부러 공을 놓치고 더듬거리는 사이에도 결코 에러를 범하지 않았으며 타율 또한 ,375이나 쳐댔습니다.
결국 예외적으로 9차전 승부였던 경기는 마피아와 도박사의 협박속에 8차전에서 신시네티 레즈에 월드 시리즈 승리를 내주고 말았으며 이듬해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끝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8명은 영원히 메이져리그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조 잭슨은 고향인 그린빌에 돌아가 술도매업을 하다 1951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마이너리그에서 한동안 시합을 뛰었다는 증언들이 있으며 각종 서적과 영화등에서도 그런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조 잭슨과 블랙삭스 스캔들에 관한 영화로는 'Shoeless Joe' 라는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꿈의 구장" 과 "Eight Men Out"가 대표적이며..제가 제목도 기억을 못하는 몇편이 더 있는 걸로 압니다.
야구의 역사에서 불행한 선수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겠지만 그 많은 억울하고 불행한 선수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있다면 그건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맨발의 조 잭슨"을 꼽을 것입니다.
시삭스는 플옾부터 리그 챔피언쉽,월드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귀신에 씌운듯한 심판들의 어이없는 판정과 믿기 어려운 역전 만루홈런, 시즌내내 홈런이 없었던 선수의 끝내기 홈런..등....무언가에 이끌리듯 86년만에 한풀이를 해내었습니다
드디어...조 잭슨이 용서를 한것일까요?
악덕 코미스키는 아직도 메이저리그 한페이지를 영광스럽게 장식하고 있고 메이저리그 역대 타율 3위의 조 잭슨은 영원히 퇴출되어
아직도 명예의 전당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판에 말입니다.
혹시...시간이 되시면 "꿈의구장"을 다시 한 번 봐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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