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아무도 모르리라는 회심의 장소에
숨어서 그저 깜빡 정신을 놓쳤을 뿐인데, 아이가 깨어났을 때 세상은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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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 안은 따뜻했다. 온 몸을 구부리고 무릎을 팔로 꼭 감싸안고 머리를 파묻자,
마치 솜이불처럼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하루종일 뛰어 노느라고 지쳐버린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기에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솥뚜껑을 열고 나오자마자 아이의 눈에 뜨인 것은 저녁의 붉은 해를 받은
핏빛 노을과 부엌 문간에서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이었다.
엎드려 있는 뒷모습이 낯익은 사람.
그의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비린내 속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냄새.
아이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저 다가가서 그 사람을 들쳐보고 마침내는 뒤집었지만,
그의 부릅 떠져 있는 두 눈에 새겨져있는 두려움과 공포, 가슴에 휑하니 뚫려있는
구멍과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핏물만이 아이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그제서야 상황을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목을 쥐어짜며 질러내는 새된 비명과 함께 아이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다가
뒤로 넘어가버렸다.
그것이 아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예전에 무협소설을 써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 글을 쓰기 시작했더랬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거창하기라도 한 듯 해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거의 한 권...즉 텍스트 파일로 십만 바이트에 가깝게 써나가서
조금씩 연재해볼 생각에 두근거려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때 처음 시작했던 서문이 바로 저런 얘기였습니다.
근 오년만에 기억을 되살려 써보니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 하군요.
물론 저 정도로 천박;;한 수준은 아니었고,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썼던 터라
아무 것도 모르는 한 아이의 성장기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를 담고
써보려던, 정말 말 그대로 야망이었죠.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에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되풀이 읽어보며 끊임없는 퇴고와 스토리 교정에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매일 조금씩이나마 열심히 써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가 저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로 정리해두었던 등장인물들의 배경, 등장하는 문파, 무공 명, 구대문파에서
새외문파, 마교, 무림맹 등 장차 제가 창조한 녀석이 활동할 곳들에 대한 배경까지
함께 승천해버렸습니다.
정말로 눈물이 울컥 나오더군요.
그 때가 군대 갔다와서 대학교 2학년 복학을 앞두던 시기.
지금은 대학교 4학년. 취업을 앞둔 시기.
그 동안 계속해서 다시 한 번 써보려고 했지만, 그 공을 들인 그 때의 문장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절대 쓰지 못하겠더군요.
그렇다고 새로운 스토리를 써보자니, 그 때 그 스토리가 눈에 밟힙니다.
난데없이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정말 보고 싶은 소설이 있지만,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소설이라
눈물을 머금고 거의 포기 수준에까지 이른 지금 심정이
마치 그 때와 비슷한 것 같아서 그냥 저도 모르게 주절거려봤습니다.
...사모;하는 풍종호님의 화정냉월을 구하려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절판이라는 두 글자만이 또 다시 눈에 밟히네요.
3, 4 권을 보지 못한 심정이 괴로워서 그냥 한 번 남겨봅니다.
예전에 고무림 연재한담이나 감상 및 비평 란에 화정냉월 구하셨다는 리플을
발견하셨다는 분...
...진심으로 축복드립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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